전통무술에 대한 소고

권법이나 무술을 고대에는 수박(手搏)이라고 불렀습니다. 말 그대로 손으로 때린다는 말입니다. 간혹 手擘, 手拍이라고 표기하기 도 하지만 모두 같은 뜻입니다. 이 수박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고대의 중국역사서인 『한서(漢書)』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주해에 의하면 수박은 변이다(手搏爲卞)라고 했습니다. 격투술이라는 얘기입니다. 변(卞)은 맨손으로 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쓰여진 모원의의 『무비지』라는 책에도 '권이라는 것은 옛날의 수박이다'라는 설명을 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살았던 한 사람이 자신의 주변사람에게 '나는 권법을 배우고 있어' 라고 말한다면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권법이 뭐야'라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권법은 새롭게 쓰여지는 말이었으니까요. '권법이 수박과 같은거야'라고 대답한다면 '아. 그거~'라고 쉽게 이해를 했겠지요.

문헌적으로 본다면 명나라말까지 권법이라는 말보다 수박이 격투를 의미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중국,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수박은 격투를 의미했습니다. 일본의 에도막부시대의 무술들은 많은 경우 유술(柔術)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에도기의 자료를 조사해보면 연대, 유파에 따라 포수술(捕手術), 화(和), 화술(和術), 타수(打手), 박타(縛打), 수박(手搏), 체술(體術)등등의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원래 유술은 현대의 유도나 합기도류의 잡고 조르기, 꺾기 등등의 기술만이 아닌 주먹으로 가격, 발차기 등의 기술이 있 는 말 그대로 권법이었는데 근대의 유도라는 무술은 카노오 지고 로오가 기술을 엄선하여 새롭게 만들은 것입니다. 현재도 일본의 고무도류의 무술에는 발차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박은 고유한 무술의 유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3국에서 격투술을 의마하는 일반명사일 뿐입니다.

한국에서 수벽치기라는 것은 '역전앞'의 경우와 같이 치기의 치기라는 동어반복일 뿐입니다. 수벽치기가 한국어의 손뼉치기의 한자어로 음사되는 과정에서 手擘, 手拍, 手搏등의 여러가지 표기가 나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수박이란 단어는 중국과 일본의 전적에서도 옛날부터 무수히 발견되는 것입니다. 만약 위의 황당한 가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해당 한자의 중국어 고음과 한국어 고음이 구성되야 하고 변화과정도 추적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들을 진실로 주장한다면 얼마 전에 유행했던 덩달이시리즈처럼 웃어넘겨야 할입니다. 음가의 유사성이 의미의 동일성과는 다른 것이니까요. 따라서 수벽치기는 전수경로도 불확실할 뿐 아니라 그것의 관한 설조차 근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수벽치기는 완전히 사료의 오독에서 출발한 것이니까요. 택견의 전수자이셨던 신한승선생님은 수벽치기에 대해 전혀 모르셨다는 것이 주변의 정론입니다. 없는 것은 배울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신한승선생님조차 사료의 오독으로 인해 '전통무술인 수벽치기가 있다'라고 생각하셨을 수는 있습니다.

현대의 수벽치기가 사료의 오독에서 출발한 증거는 '손뼉치기'라며 장법을 단련하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박은 격투술이지 장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무술의 '편린'들을 찾아다녀 몇가지 기술들을 모아 이것을 수벽치기라고 명명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창작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상황일 것입니다. 전통이라고 주장한다면 100년이상 3대이상의 족보가 확인이 되야 합니다. 음악, 미술, 탈춤, 판소리 등등의 예능은 남아있는데 무술은 왜 유독 이 맥이 끊겨있어야 할까요.무시해서? 쓸모가 없어서?.그래서 우리의 몸짓을 보려면 꼭 탈춤을 참고해야 했을까요? 이 난관을 무리없이 극복할 수 있는 대답은 여태까지 '일제가 탄압했기 때문'입니다.

왜 무술만 탄압해 흔적이 없어졌을까요. 결론은 명백합니다. 무술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무술에 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술이라는 것이 밥상 위에 숟가락같이 몇 천년을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도 그렇습니다. 중국에는 찬란한 무술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중국에서 나오는 책들을 보면 과거의 무술전통들이 문화혁명으로 명맥이 끊겼다가 모택동 사후에 다시금 발전기를 맞는 것처럼 써놓는데 그런거 아닙니다. 걔네도 무술이 발전하고 대중화되기는 1970년대 이후입니다. 한국도 일제식민지 때문에 무술의 전통이 말살되었다가 은밀히 전수된 맥을 통해 다시 공개되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역시 그런게 아닙니다. 한국도 중국도 무술의 대중화는 1970년대 이후입니다. 중국의 무술전통이 흥했던거처럼 착각하는 이유는 그런 방면 책만 보아서입니다. 무술관련 책만 보면 무술얘기만 나오는 것이 당연하죠. 하지만 중국에서 전체사회에서 무술이 차지했던 비율을 따져본다면 얼마나 될까요.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시대 중기에 나온 유명한 백과사전식의 책을 보면 무예는 길거리 불량배가 배우는 것이며 제대로 된 사람들은 배우지 말아야 한다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선시대가 숭문천무의 기풍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술이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중앙집권화 된 국가에서 무를 숭상한 적은 없습니다. 당시의 무술의 일반적인 인식이 그러했음이 분명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무술들이 고유성과 독자성, 혹은 전통성 을 내세우며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의 대부분 99%는 근거가 없는 내용들입니다. 현재 전통이다, 고유하다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사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마켓팅의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타 무술에 비해 차별성을 강조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한국의 소위 자칭 전통무술 전수자 들은 금강불괴만큼 인간문화재도 되고 싶나봅니다. 왜 전통무술의 스승들은 은거하거나 먼저 죽어야만 할까요. 자신의 스승은 세상에 나오기 싫어하고 사문의 내력은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까요. 사실 여부를 떠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 밑에 가서는 배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자의 참된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한가지 건강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원화도입니다. 저는 물론 원화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원화도의 창시자인 한봉기 선생님은 원화도를 창시하셨다고 말하고 밑에서 수련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원화도에는 '비손'이라는 좋은 이론이 있습니다. 아직 문파가 발전해가는 단계이고 비손의 '결'을 터득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지만 원화도는 앞으로 발전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합리적이며 자신들의 단점과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술의 배우는 목적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통무술이라 배 운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문주가 실력이 대단하다던 한 단체에서 무술을 배우던 학생들이 단체로 실망을 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전통무술이라는 것이 가짜로 판명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무술단체는 전통여부를 떠나 '매력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무술을 배울 때 재미로, 건강을 위해, 취미로, 또는 호신을 위해 배웠다면 그런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술수련은 삶의 즐거움과 연결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아직 젊기 때문에 합리성과 보편성을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전통에 관한('있다면')것을 배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선과 무도

다음은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인 카타마 시게오(鎌田茂雄)의 선 과 무도(禪と武道)라는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카타마 시게오는 1927년생으로 현재는 토오쿄오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로 재직중 입니다. 한국에도 그의 저서가 여러권 번역되었습니다. 이 글은 『선무학술논집』제1집, 1991, pp.47-57에 실려있습니다. 『선무학술 논집』에 일본어로 게재된 글을 무예와 역사연구소가 요약, 번역하습니다.

일본에서 선과 무술이 관계맺음은 일본의 선사 타쿠앙이 살았던 시대에 중요한 시기를 맞이합니다. 선승인 타쿠앙은 당시 유명한 검법가인 유생종거(柳生宗矩,야규우무네노리)에게 「부동지신묘록不 動智神妙錄」이란 글을 써 줍니다. 유생종거는 요시카와에이지가 쓴 소설 『미야모토무사시』에도 등장을 하는데, 미야모토무사시와 동시대를 산 검법의 명인입니다. 미야모토무사시가 살아있을 때는 무명의 시절을 보내고 『오륜서』로 후대에 명성을 얻은 것과는 달리 유생종거는 당대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일본무술에서 선을 말한 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 錄」입니다.

타쿠앙이 유생종거에게 「부동지신묘록」을 써 주었다는 것은 '달마가 동쪽으로 갔다는' 것 만큼이나 화두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를 들자면, 신라시대의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지어 낭도들에게 준 것에 비교할 수 있을런지요. 「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과 『오륜서』는 무예와 역사연구소 에서 번역을 해서 21번 명저소개란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오륜서』는 이미 통신에 많은 복사본이 나돌아다니는데, 번역상에 오류가 많습니다. 『오륜서』에 나오는 태도(太刀)는 대검이나 장검이 아니라 현재 사용하는 일본도가 유행하기 전에 쓰인 전쟁용 칼입니다. 허리에 찰 때도 현재의 일본도와는 달리 날을 아래로 차며, 길이도 훨씬 길고 칼의 장식도 다릅니다. 지금 말하는 일본도는 정확 히 말하면 타도(打刀)라고 합니다. 허리에 칼날을 위로 해서 차지요. 태도(太刀)는 전쟁용 무기로 분류되어 에도시대에 들어오면서 소지가 금지됩니다. 태도가 금지되자 앞을 잘라 타도로 만들어 현 재 남아 있는 태도는 수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번역 오류 상의 한가지 예이며, 아직 지적할 부분은 부지기수입니다.

요시카와에이지의 소설속의 무사시가 아닌 '인간 무사시', '검법가 무사시'를 만나려면 『오륜서』를 읽어야 합니다. 무사시가 그린 「고목백설조枯木百舌鳥」란 그림을 보면 길다란 나무가지 위에 새가 앉아있는데, 앞을 노려보는 새의 눈이 매섭게 빛납니다. 혹시 무사시 자신의 눈을 그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여간 『오륜서』는 훌륭한 서적입니다. 극진가라테의 최영의도 가장 탐독한 서적이 『오륜서』이며 자신이 직접 『昭和오륜서』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군요. 그럼 카타마 시게오(鎌田茂雄)의 「선과 무도」시작합니다.

■ 선과 무도(禪과 武道) ■

▶ 들어가는 말
선은 중국에서 성립되어 독자적인 발전을 이뤄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신라시대, 한국에 들어간 선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어 조계종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겸창(鎌倉)시대. 중국의 송나라로부터 전해진 선은 일본선으로서 독자적인 전개를 이루었다. 도원(道元)에 의해 전해진 선은 일본 조동종(曹洞宗)을 성립시켰다. 영서(榮西)에 의해 전해진 임제선(臨濟 禪)은 응등관(應燈關)의 흐름으로 발전하여, 일본임제종이 성립하였다.

일본의 선은 다도, 화도(華道) 등의 일본문화와 깊게 결부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의 무도 철학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철학의 정점에 있는 것이 타쿠앙(澤庵)의「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 錄」,「태아기太阿記」이다. 또 유생류(柳生流,야규우류우)의 병법가 전서인 「살인도」와 「활인검」에서 무도의 철학으로서 선을 채용하 고 있다.

본고는 타쿠앙의 「부동지신묘록」과 유생가(柳生家)의 전서에 근거하여 선과 무도의 철학, 선과 무사도에 대해 서술하려 한다.

▶ 타쿠앙의 생애

타쿠앙은 천정(天正) 1년(1573년) 12월. 단마국(但馬國의) 출석성 (出石城)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추정능등수평강전(秋庭能登守平網 典)이라고 하며 출석성주 산명종전(山名宗詮)을 모시고 있었다. 세상은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노부나가)가 비예산(比叡山)에서 화공 (火攻)으로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다.

타쿠앙의 관상을 보니 이 아이가 불도에 뜻을 둔다면 반드시 훌륭 한 승려가 될 것이라 하였다. 타쿠앙은 3번이나 초대받은 에도에 들어가 유생가의 별장인 검속암(檢束庵)에 머물렀다. 덕천가광(德川家光)은 에도 체재중의 불편을 생각하여 타쿠앙을 위해 동해사라는 절을 세워주었다. 그 토지도 절이름도 가광 자신이 고른 것이다.

타쿠앙에게 상황(上皇)을 비롯하여 쇼군, 다이묘, 공경 등의 고위층과 교섭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타쿠앙은 시 문, 와카, 서예, 그림, 다도 등에도 숙달하여 이것이 교화의 수단, 인연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 것이다. .

타쿠앙(1573∼1645)의 「부동지신묘록」이나「태아기」에 쓰여진 선의 마음과 검의 마음은 유생류의 병법가전서인「살인도」와 「활 인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살인도」와 「활인검」은 유생종엄(柳生宗嚴), 종거(宗矩) 부자 2대에 걸쳐 고안된 유생신음류(柳生新陰流)의 기법 및 마음가짐의 이론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유생류의 검법서 중에는 선의 영향이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유생 종거(柳生宗矩)는 왜 선을 배운 것인가. 그것을 위해서는 유생종거와 타쿠앙과의 교섭을 이야기해야 한다. 유생종거는 타쿠앙보다 4살이 많으며, 젊은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 던 것 같다. 종거는 타쿠앙의 선을 젊었을 때부터 배웠다.

유생단마수종거(柳生但馬守宗矩)는 3대 쇼군 가광(德川家光,토쿠카 와이에미쓰)에게 검술을 지도하였다. 가광에서 검법을, 그 기법의 면에서는, 거의 남김없이 전수하였지만 마음가짐의 오묘한 도리를 그에 덧붙여서 가르쳐야 한다고 느꼈다. 그 때, 종거는 젊은 시절부 터 선을 배운 타쿠앙을 추천하여 관동(關東, * 현재 토오쿄오가 있 는 지역, 실질적인 통치자인 쇼군들은 이곳에 살았다. 日王은 쿄오 토오에 거주)으로 오게 된 것이다.

도대체 타쿠앙은 어느 정도의 선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타쿠앙이 임종할 당시의 기록인 「만송어록萬松 語錄」을 보면 된다.

정보(正保) 2년(1645) 12월 11일, 베갯맡에 모인 승려들이 타쿠앙 에게 세상을 떠나기 전의 게(偈)를 요청했다. 타쿠앙은 손을 흔들어 거부하였다. 그러자 승려들은 오히려 게를 쓰도록 부탁했다. 타쿠앙은 붓을 들고 단지 '꿈(夢)'이란 한 자만을 쓰고 붓을 던져버리고 죽었다. 73세의 일이다. 타쿠앙은 유언에서 시신을 뒷산에 묻고 흙을 덮어버리는 것으로 족하다, 경을 읽을 필요도 승려를 불러 재를 지낼 필요도 없다. 속세에서 시주를 받아도 안된다, 승려들은 평소 대로 생활하면 된다, 묘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안치해서는 안된다, 위패도 불필요하고 시호도 필요없다. 본산의 묘당에 자산의 목패를 봉헌할 필요도 없다. 또 자신의 일대기나 연보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묻은 장소에 무덤 대신에 소나무 한 그루만 심어달라고 하였다.

이 타쿠앙의 유언은 타쿠앙의 사람됨을 잘 나타내준다. 선승이 게를 남기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죽기 직전, 쓴 것이라면 게에 해당 되지만 생전에 써놓은 것은 유게(遺偈, 죽기 전에 남기는 게)가 아니다. 타쿠앙은 유게를 까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쾌한 독경도, 재도, 시주도 필요없다, 장례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선승이 라면 장례 등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현재의 고승들은 타쿠앙을 본받으면 될 것이다.

장례를 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다. 묘도 위패도 선사의 시호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일대의 연보와 일대기를 쓰지 말라는 것은 자신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으며 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타쿠앙이다. 타쿠앙은 진정한 선승이었다. 이런 타쿠앙에게 사사한 유생종거의 검법 서에 선의 영향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부동지신묘록」의 사상

타쿠앙은 검도의 수행이란 사람 마음의 '구속'을 없애는 수행법이라 고 했다. '구속'이란 자유스러운 마음, 무심한 마음이 아닌 집착하는 마음을 말한다. 타쿠앙이 유생종거에게 준 「부동지신묘록」은 검도의 수행에서 어떻게 이 '구속'된 마음을 없앨까를 말하고 있다. 검의 승부는 한 찰나에 결정된다. 따라서 그 마음도 동작도 한 순간의 정체라도 허락되지 않는다.

구속된 마음은 '고정된 마음'이라고도 한다. 과거에 집착하는 마음이 고정된 마음이며, 그런 것이 있다면 검의 시합에서는 한순간에 뒤쳐질 것이다.

구속되지 않은 마음은 무심(無心)이다. 무심하게 검을 움직일 때 그 궁극에서는 '무도(無刀)의 마음'이 된다. 원래 무도의 의미는 빈 손으로 상대의 칼을 빼앗는 것이지만 더욱 해석이 확대되어 태도 (太刀, * 태도의 설명은 이 글의 1편에서 했습니다)가 없는 경우, 자신의 손, 부채, 나뭇가지든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을 자유롭게 사 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정신적인 의미까지 붙여져 검에서 공격자세, 틈, 기타 일체의 동작이 무도(無刀)의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고 되었다. 무도(無刀)의 해석이 이처럼 변화한 것은 타쿠앙의 영향이라고 한다. 타쿠앙은 마음가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을 두는 곳,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 적의 몸 움직임에 마음을 두면 적의 몸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기고, 적의 태도(太刀)에 마음을 두면 적의 태도(太刀)에 마음을 빼앗기고, 적을 베려는 생각에 마음을 두면 적을 베려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긴다. 나의 태도(太刀)에 마음을 두면 나의 태도(太刀)에 마음을 빼앗기고 내가 베이지 않으려는 생각에 마음을 두면 내가 베이지 않으려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고 상대의 자세에 마음을 두면 상대의 자세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렇다면 마음을 둘 곳은 없지 않은가.

이것은 적과 마주쳤을 때 마음을 어디에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을 말한 타쿠앙의 유명한 일문이다. 거시에서는 도대체 마음을 어 디에 두면 좋을까, 어디에도 두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공간, 모든 장소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모든 곳에 두루 채운다는 것은 일체 곧 기(氣)를 채운다 는 것이다. 기가 사방에 꽉 채워져 있어야 한다. 기라는 것은 어디서 발하는 것인가. 허리아래 단전에서 발하는 것이다. 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광석화와 같이 발하는 것이다.

선은 좌선에 의해 기를 단련한다. 그것을 위해 수식관(數息觀)이라는 호흡법을 중시한다. 태극권이나 합기도에서도 기의 움직임을 가장 중요시한다. 태극권에서는 어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중국의 양자강의 흐름과 같이 유구하게 무한히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신체와는 별도로 기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움직임 속에 기 가 있다. 아니, 기가 실재하기 때문에 마음과 신체라는 것은 단순히 추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타자의 죽음을 전제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된다는 잔혹비정한 관계가, 생명이라는 것에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는 자기가 타자에 대해 자기를 어떻게 유리하게 만들것인가라는 행동원리가 발생한다. 이것이 싸움의 본질이다. 그런데, 일본무도의 철학은 타자와의 대립 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싸움의 순간에 삼라 만상을 관통하는 기와 일치할 것을 설파한다. 그것은 천지의 기와 자기의 기를 맞추는 철학 이다.

'부동이란 움직이지 않는 다는 뜻이며, 지는 지혜라고 할 때의 지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돌이나 나무같이 정지해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면서 결국은 아무데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부동지라고 한다.'「부동 지신묘록」

부동지란 움직이지 않는 지라는 것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돌이나 나무처럼 꼼짝 않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타쿠앙이 말한 부동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전후좌우,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면서 조금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부동지라고 하는것이다.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부동지이다.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모순된 개념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하늘을 나르는 새를 생각하면 된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새가 나르는 것을 보면 A점에서 B점으로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절대적이고 끝없는 공간을 나는 새는 어떻게 움직여 도 완전히 정지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한정된 공간을 나르는 새는 보통사람이 보는 새이고 절대무변(絶對無邊)의 공간에서 본 새는 부처가 본 새이다. 보통사람이 본 새는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구별되지만 부처가 본 새는 움직이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 이고(動卽不動) 움직이고 있는 것이 영원한 정지이다.

동(動)과 부동은 서로 배제하는 개념이 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분별지로 생각하면 모순이 되는 것이다. 이 모순이 모순인 채로 모순이 안되는 것은 행(行, 실천적인 면에서)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쿠앙이 말하는 부동지의 진리는 소위 논리적으로는 이것 을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행(行)을 수련해야 한다. 이리하여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구애됨이 없이 자재로 마음을 움직일 있게 된 것이 부동지의 경지이다.

타쿠앙은 정신적인 수행, 마음가짐을 리(理)의 신체, 태도(太刀) 잡는 법을 사(事) 수행이라고 했으며 이 리와 사의 수행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행할 것인가를 말한 것이 '순간적으로'라는 것이다.

손으로 때리는 것과 동시에 소리가 내야 한다. 여기에 일순간에 잡념이 들어가면 손으로 때리는 것과 발성을 하는 사이에 틈이 생 긴다. 타쿠앙은 이것을 석화의 기(石火의 機)라고 하였다. 석화의 기(石火의 機)란 돌을 때릴 때, 불똥이 튀도록 돌을 때리는 것과 불똥이 튀는 것에는 틈이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선의 가르침에도 있다. 선종에서 사가(師家)와 학인學人이 문답할 때, 한순간의 틈도 없이 대답을 해야 한다. 어떤 질문을 했다면 그 말이 그치기 전에 대답이 나와야 한다. 대답의 내용이 좋고 나쁨은 말할 필요 없다.

조금도 지체함이 없는 마음이 중요하다.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마음이 부동지이다. 아무개야~라고 불렸을 때 누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는가 생각한 후에 '무슨일입니까'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순간적으로'라든가, 전광석화 같다는 것은 빠 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결코 그것은 아니다. 마음 을 사물에 두지 않는 것이 전광석화이며,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마음이 머무르면 안되는 것이다. 빠르게, 빨리 움직이려는 생각 자 체가 이미 마음이 머무르는 것이 되며 부동지가 아니다. 타쿠앙이 말하는 부동지는 다른 말로 하면 무심(無心)이다. 무심이 란 '머무르는 곳이 없는 마음'이다.

어떤 것을 하더라도 머무르는 마음이 없고 무심한 사람을 제도(諸 道)의 명인이라 한다. 선에서는 머무르는 마음에서 집착이 생겨나고 무명(無明)의 미혹속에 방황하게 된다. 꽃을 보고 그대로 꽃인줄 알 면 그것이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다.

머무르지 않는 마음은 무슨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고 무심이며 그것은 그대로 사람에게 갖추어진 본연의 마음이다. 타쿠앙은 무심을 본심(本心)이라고 한다.

본심이라는 것은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고 전신, 전체에 늘어나 확장된 마음이다라는 것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무한히 넓어지는 마음이다. 그 것은 비유를 하자면 본심은 물과 같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머무른 마음은 망령된 마음이며 얼음과 같은 것이라고 타쿠앙은 말 한다.

물과 얼음은 근원은 같지만 얼음으로는 손도 얼굴도 씻을 수 없다. 얼음을 녹여 물을 만들면 어디에나 흐를 수 있으며 수족을 씻을 수도 있다. 그것과 똑같이 사람의 마음도 물과 같이 만들 필요가 있다. 마음을 녹여 늘려 늘려 흐르는 상태로 만든다면 본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의 본심은 머무르지 않는 마음, 흐르는 마음이지만 보통사람 의 이미 그것을 한 곳에 고정시켜 버린다. 그것에 의해 미혹이 생겨난다. 무심의 상태에 있을 때 그 마음은 우주에 두루 퍼지며 그 기는 무한히 흘러간다. 타쿠앙이 말하는 검선일여(劍禪一如)의 머무르지 않는 마음, 무심의 마음은 검도에서만 응용할 수 있는 마음은 아니다. 그것은 합기도에서도, 태극권에서도, 그밖에 모든 제도(諸道)에서 지향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이 마음의 수련은 머리에 의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쿠앙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뜨겁고 차가운 것을 아는것 처럼 스스로 알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직접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 수행도 1년, 2년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3년한다면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10년한다면 드디어 형을 이루고 어느정도 수행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 궁구해야 할 것은 리(理)의 수행, 정신적인 면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20년 수행에 의해 리의 수행을 드디어 신체로 느낄 수 있다. 30년 한다면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 무엇이지 알 수 있다. 어떤 무도에서도 그 길을 안다는 것은 힘들다.

무한의 구도야말로 선과 무도의 요체이다. 그것은 또 고독의 길이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고독의 길을 오로지 걷는 다는 것은 명성, 처와 자식, 재산 등 인간이 가진 일체의 것을 버려야 한다. 더욱 자신의 생명도 일순간에 버릴 각오가 되있어야 한다. 확실 히 그 죽음에 대해서는 타쿠앙의 임종시와 같이 일체를 버리고 공 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선의 도도 검의 도도 이렇듯 진정한 도이며 우주의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국검법의 진실

무예도보통지』를 숭앙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해석상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예를들어 '신라검법'이라는 본국검법이 우리에게 있다고 자부심을 많이 가지는데 문헌 속으로 돌아가 해 석을 다시 해보자. 본국검법의 기원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한문 해석은 한자 한자 치밀하게 해야 하는데 『무예도보통지』 해설서 중 자기 맘대로 해석한 것도 있다. 본국검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도조의 전반부도 같이 싣는다. 예도조의 이 내용은 원래 『무비지』에 있는 것을 『무예도보통지』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예도조의 본문과 해설은 다음과 같다.

卷之二, 銳刀

(原) 茅元儀曰古之劍可施戰鬪, 故唐 太宗有劍士千人, 今其法不傳, 斷簡殘 編中有訣歌, 不詳其說, 近有好事者, 得 之朝鮮, 其勢法俱備, 固知中國失而求 之四裔, 不獨西方之等韻(西域僧神拱, 通音韻, 撰等切譜), 日本之尙書(歐陽修 日本刀歌, 徐福行時書未焚逸書百篇, 今尙存, 令嚴不許傳中國擧, 世無人識, 古文言書經古本, 徐福携去, 尙存日本, 蓋托言也)也. 備載於左劍訣歌.

▶예 도

모원의는 옛날의 검은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로 당태종에게는 천명의 검사가 있었다. 지금 그 법은 전하지를 않고 단잔간편 중에 결가가 있으나 그 설이 상세하지 못하다. 근래에 호사자가 그(검결 가를)것을 조선에서 얻어 세법이 구비되니 중국에서 잃어버린 것을 주변 국가에서 구한 것이 서방의 등운이나 일본의 『상서』뿐만은 아니다. 좌측에 검결가를 싣는다.'

등운(等韻)이란 중국음성학의 한 종류이며, 등운학(等韻學)이라고 한다. 그 자체로 단행본의 이름은 아니다. 따라서 단행본인 마냥 쌍꺽쇠로 인용할 필요는 없다. 모원의가 언급한 ' 서방의 등운'과 신공이 한 일과는 많은 관련은 없다. 등운은 음성학의 대표적인 분야로 보고 비한족(非漢族)인 신공이 중국의 음성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등운의 설명에 "서역승인 신공이 음운에 통하여 등절보를 저술하였다 (본문의 첫번째 괄호 안에 있는 구 절)"라는 구절은 『무비지』에 있지 않고『무예도보통지』의 저자들이 주석을 단 것이다.

다음 구절인 일본의 『상서』의 주석도 마찬가지다. 신공(神珙)은 당대 (唐代)의 서역(西域)의 승려이다. 자세한 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옥편(玉篇)』에 그의 저(著)인 사성오음구 롱반뉴도(四聲五音九弄反紐圖)가 실려져 있다. 그 서(序)에 원화음보(元和 音譜)가 인용되어 있기 때문에 당 (唐) 헌종(憲宗,805-820)이후의 사람이라고 추정할 뿐이다.『옥편』은 한국에서는 한한사전(漢韓辭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중국 남북조시대인 양무제(梁武帝)대동(大同) 9년(543년)에 태학박사(太學博士) 고야왕(顧野王, 519-581)이 지은 자서 (字書)이다.

서복은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동쪽으로 보냈다는 사람이다. "구양수의 일본도가에 서복이 떠났을 때는(일본으로 가져간) 불살라지지 않고 지금은 없는 책 백편이 있었다. 그러나 엄령을 내려 중국으로 가져 가지 못하게 하여 세상사람들이 알지를 못하나 고문에서 말하는 『서경』의 고본이다. 서복이 가져가 지금 일본에 있으니 이말을 인용한 것이다"

본국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卷之三, 本國劍 (增) (俗稱新劍)

(增) 輿地勝覽曰黃倡郞新羅人也. 諺 傳季七歲入百濟, 市中舞劍, 觀者如堵. 百濟王聞之名觀命昇堂舞劍倡郞, 因刺 王, 國人殺之, 羅人哀之, 像其容爲假 面, 作舞劍之, 狀至今傳之(案) 黃倡一 作黃昌, 卽新羅所置花郞也. 如述郞永 郞之流故曰黃倡郞也. 花郞徒衆嘗數千人, 相與勉礪忠信, 且新羅隣於倭國則其舞劍器, 必有相傳 之術而不可攷矣. 今因黃倡郞爲本國劍 之緣起. 焉至若茅元儀以爲劍譜得之朝 鮮, 朝鮮旣譬於西域之等韻則是朝鮮自 本國之譜也. 又譬於日本之尙書則是朝鮮爲傳中國之 譜也. 無論其其傳今距茅氏之世爲百數 十年則互相授受者爲誰而不少 見何歟. 本國之人, 何不自傳自習 必待茅氏 武備志而傳習之, 未可知也. 前旣言 其茅氏之假託而今又臾論本國劍之下.

본국검 (신검-새로 만든 검법-이라 한다)

『여지승람』에 말하기를 황창랑은 신라인이다..... 백제인이 그를 죽이니 라인(신라인)들이 슬퍼하였다......또 신라는 왜국과 이웃하고 있으니 그 검무가 반드시 전해졌을 것이나 밝혀낼 수가 없다. 이제 황창랑을 우리 나라 검술의 시초로 삼고자 한다. 어찌 (우리가) 검보를 조선에서 얻어갔다는 모원의와 같겠는가. 조선이 서역의 등운에 비유 되는 것은 조선이 스스로 우리나라의 검보를 만든 것이고, 또 일본의 『상서』에 비유하는 것은 조선이 중국의 검보를 전해 받은 것이다. 그 만든 것과 전해 받은 것이 지금 모원의의 시대로부터 백수십년이 지나서 논할 수가 없으므로 서로 주고 받은 것이 누구였는지는 자세히 알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전하지 않아 모씨의 『무 비지』를 기다려 전하고 익혔는지 알 수 없다. 전에 이미 모원의를 언급하여 이야기 하였고 지금 잠시 본국검의 장(章)에서 논의를 하였다.

황창랑에 대한 고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고 이 고사가 인용된 『여지승람』 에는 어느 책을 참고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여지승람』에는 이첨(李詹)의 고증이 있다. 이첨은 경주에 가서 칼춤을 추는 동자를 보게 되었는데 황창의 고사는 그 동자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다. 이첨 자신도 황창의 고사가 관창의 이야기가 와전 된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칼춤을 춘 동자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 동자 자신도 칼춤의 기원을 황창으로 올려잡은 것 뿐이다. 역시 황창의 고사를 만들어가 탁한 것에 불과하며 본국검과 이 칼 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의 저자들은 우리 나라에도 황창이 칼춤을 추었다는 고사가 있고 모원의도 조선에서 검결을 얻어갔다고 하는 만큼 검술의 전통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 것이다. '이제 황창랑을 우리나라 검술의 시초로 삼고자 한다(今因 黃倡郞爲本國劍之緣起)'라는 구절은 해석이 좀 미묘한데, 이 구절을 '이제 우리 나라 검술의 기원이 밝혀졌다'는 식의 해석은 완전한 오류이다.

연기(緣起)와 기원(起源)의 의미는 다른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의 저자들도 단지 황창랑의 고사를 우리 나라 검술(本 國劍)의 시초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 칼춤이 왜국에 전해졌을 것이라던가 모원의의 말을 빌려 등운과 일본의 『상서』 운운하는 것에서 저자들의 추측과 의도를 알 수 있다.

 

 


무예도 보통지에 대한 의견

무예도보통지 한번 보지 않은 무술인은 지금 한국에 거의 없을 것 입니다. 저도 오래전부터 보아왔고, 연구해 왔습니다.

무보지가 중국, 한국, 일본의 무술을 모아다가 만든책 이란것은 이제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고, 그중에 실제 '전통적' 으로 '전해진' 한국무술은 애석하게도 단 한개도 없습니다.

예도는 중국 무비지에서 조선세법으로 실린것을 베껴 왔으니, 그 얼마나 순수성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본국검법은 임진왜란 이후에 군사용검법으로 창작한 것이니, 그것도 전통과는 거리가 멀고, 차포 떼고 나면, 전부 중국과 일본무술 아닙니까...

무보지에서 한국검술 연구하려면, 예도 빼고는 해 볼만한 것이 별로 없는 실정이지요. 또한 중요한 문제는..... 무예도보통지가 실제로 조선군대에서 수련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수련되었일지도 모르지만 조선 후기쪽으로 진행되면서 흐지부지 되었던 듯 해요. 조선군에서 실제로 수련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더 많습니다. 또한 '무예도보신지(武藝圖譜新志)'라는 책도 있습니다. '무예도보신지(武藝圖譜新志)'의 왜정시대 판본에 보면, 대부분의 무술기예가 없어져 버렸으며, 금계독립세가 일본검술의 '상단세'로, 맹호은림세가 역시 일본검술의 '중단세'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또한 총검술과 총검과 재래식무기의 대결이 삽화로 나와있는것을 보면, 무예도보통지의 내용은 한동안 내려오다가 많이 수정된 것 같습니다. 일본검술과 매우 많은 부분에서 혼혈된 흔적이 많아요.

제가 본 '무예도보신지'는 왜정시대 판본과 1947년에 발행된 판본으로써, 이승만 전대통령의 이화장 서고에서 나온 1947년 판본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판본은 어떠한지 알 수가 없으며... 왜정시대 들어서면서,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이 만든 책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 입니다. 책 서문에 '조선의 독립을 어쩌고..'써져 있거든요.

왜정시대에 만주에서 독립운동 하던 독립군들도 무술수련을 했는데, 그 무술의 내용이 무예도보신지의 내용과 거의 같으며, 수련 내용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도 제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무예도보신지와 유사한 내용과 일본무술을 함께 가르쳤더군요.

무예도보통지의 의의는 호국에 대한 선조들의 의지표명과 군대 훈련에 대한 이런 정도의 체계적인 군사용 무술서적은 동아시아 어느 나라에도 없으니,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고 알고 있으면 되는 겁니다. 실제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지요.

일본과 중국에는 이것보다 방대한 군사서적은 많지만, 이정도로 '효율적'인 서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예관련서는 동아시아에 무예도보통지 한권이 아닙니다. 일본에는 근세의 무예서적의 이름만 써 놓은 책 목록만도 수백쪽의 책으로 나와있습니다. 본문도 없이, 책 제목만 적어도 무려 300페이지가 넘습니다. 무술연구 하시는 분들은, 이런 서적들을 구해서 보셔야 할 것입니다.

 

 


닌자란 무엇인가?

70년대부터 무술영화장르에 '닌자'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닌자는 한자어로 忍者라고 하며, 일본의 전매특허다. 닌자라고 하면 다 일본거지 한국의 닌자는 없으니까. 닌자라는 한자어에서도 보면 '참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는데, 참는다는 것은 일본인의 심성과 어울리는 듯하다. 어린아이가 오줌을 싸려해도 못싸고 참게 하는 것이 일본인이고 보면(전통적으로 일본은 다다미를 깔고 살다. 다다미에 물기가 생기면 청소하기가 힘들다), 이런 풍토에서 오래 산다면 성격이 잔인해질 것은 분명하다.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을 억지로 못가게 해봐라. 그때부터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필요없을 것이다.

닌자영화에서보면 둔갑, 암기, 은신 별의별 수단을 다쓰는 암살자로 비쳐지는데, 닌자가 자객은 아니다. 닌자는 단순히 간첩, 첩보원이라는 얘기다. 자객이 먹고살라면 사회전반에 걸쳐 서로 죽여야만 되는 적대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은 전쟁을 상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옛날 일본에서는 칼을 차고 다니니 항상 긴장하고 암살을 경계하고 산줄 아는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이 잠깐이면 모르되, 한 인간의 전 인생에 걸쳐 진행된다면 못산다. 스트레스 때문에도 금방 죽을 것이다. 조선의 선비가 갓쓰고 도포입고 다니는 것은 법도가 그래서다. 일본도 칼차고 다니는 것이 법도라 그렇게 하는 거지, 싸우려고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일본도 질서가 있고 법이 있는 사회였을텐데, 사람 함부로 못 죽인다.

거합도의 예를 들자면, 거합(居合)은 칼을 뽑는 기술, 즉 발도술이다. 거합의 탄생 연원에 대해 기존의 설명은 서로 죽이려는 사람과 있을 경우, 먼저 뽑아 죽이기 위해라는 것인데, 그런 원수와 얼굴을 마주볼 상황까지 가야할지가 의문이다. 여러분 같으면 죽이려는 원수와 마주앉아 있거나, 극장에 놀러가서 앞뒤로 앉아 있겠는가. 전쟁이 치열했던 일본의 전국시대같은 경우 이런 상황설정은 필요 없을 것이다. 싸우면서 베면 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실력을 인정받 았을 것이다. 그러나 검술은 하고싶은데 사람을 죽일 수 없는 평화 시에는 어떻게 할까. 그러면 그때부터 검술은 게임에 되는 것이다. 칼을 뽑는 이유는 거창하게 붙여도, 나란히 서서 '자! 누가 먼저 칼 뽑나, 내기하자'이상의 것은 되기 힘들 것이다. 거합은 검술의 게임화이다. 이런 것에 일본 특유에 연출된 상황, 연극적인 요소가 곁들여졌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동아시아 무술의 특성을 논하는 별도의 글을 준비하기로 하고 닌자에 관해 더 서술 해보려 한다.

닌자라는 것은 은밀히 일을 추진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이다. 한 닌자술의 서적에는 '닌자라는 것은 극히 평범하고 타인에서 시선을 끌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이름도 알려져서는 안 되며 혹시 발각되었을 때는 갖고 다니던, 폭약으로 자신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즉어야 한다. 폭약이 없다면 칼이나 돌로라도 그렇게 해서 자신과 관련된 증거를 없애야 한다'라고 쓰여 있 다.

그렇게 때문에 이름이 알려졌다던가, 그 기술을 누구에게 전수받았다고 알려진다면 진짜 닌자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닌자가 있을 턱이 없다. 이름이 알려진 닌자는 많지만 모두 전설적인 것이다. 그러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해도 불의에 체포되어 고문 등에 의해 알려진 경우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닌자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린 말일 것이다. 옛날부터 전쟁시 적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인 첫번째 일이며 따라서 스파이나 간첩은 항상 필요했으며 그를 위한 전문가집단이 생겨 나고 기술도 세련돼졌을 것이다. 정세파악뿐이 아니라 함정을 만들어 적을 속이거나 궤멸시키고 적의 기세를 꺾는 역할까지 늘린다면 닌자란 일종의 게릴라이기까지 하다.

일본에서 닌자는 특유의 전문가(專門家)라는 시스템과 맞물려 전국시대에는 이가(伊賀)와 코가(甲賀)로 발달했다. 이가(伊賀)라는 것은 쿄오토오, 나라, 오오사카로 둘러싸인 지역의 이름이다. 높지는 않지만 산으로 둘러싸이고 쌀이 생산안되는 척박한 땅이었다. 동서왕래의 길목이기도해 작은 호족들이 살고있어 서로 아웅다웅하는 통에 기습과 트릭이 발달했다. 농업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떠돌아 다녔고 그 과정에서 얻어진 소식들을 파는 사람도 생겨났다. 중에 간첩질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단체를 만들어 상인(上忍), 중인 (中忍), 하인(下忍)이란 계급을 만들어 다른 지역의 전쟁에 고용되도록 했다.

그중 상인(上忍)중에 백지(白地,모모치), 등림(藤林, 후지하야시)이라는 양 단체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양 단체를 이끌던 백지삼태부(白 地三太夫, 모모치산다유), 등림장문수(藤林長門守, 후지하야시나가토 노가미)는 노부나가가 1581년 이가(伊賀)를 공격했기 때문에 멸망하 고 죽었다고 한다. 그 두사람은 서로 견원지간으로 싸웠다고 하지만 실은 한사람이 두사람으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 아닐까라고 추정하지만 그러나 이 두사람은 무덤도 남아있고 실재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석천오우위문(石川五右衛門)
가장 유명한 닌자, 대도이며 예로부터 가부키극에 잘 나오는 석천 오우위문(石川五右衛門)은 백지삼태부(白地三太夫)의 제자이다. 그에 대해서는 황당무계한 설이 많지만 어느 쪽도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는 백지삼태부의 아내와 바람을 피워 죽여 우물에 던져버린후 쿄오토오로 도망가 도둑질하고 닌자술을 사용해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태합수실(太閤秀吉)의 암살을 꾀하다 잡혀 죽는다. (솥에 넣어 삶아 죽였다고 한다) 석천오우위문(石 川五右衛門)은 이름은 에도시대의 저명한 유생, 임라산(林羅山,하야 시라잔)이 지은 『풍신수길보豊臣秀吉譜』에도 명기되는데, 이것은 석천오우위문(石川五右衛門) 솥에 들어간지 49년 뒤의 일이다.

이가(伊賀)지역의 북쪽에 닿아있는 코가(甲賀)는 남쪽으로는 산이지만 북쪽으로는 호수도 있고 유명한 곡창지대이다. 따라서 이가(伊 賀)와는 사정이 달라 옛날부터 코가(甲賀)오십삼가라는 호족의 근거지였다. 닌자술과 관계있는 것은 코가(甲賀)의 남쪽지역으로 아마 이가(伊賀)에서 전해졌을 것이다. 코가(甲賀)의 닌자술은 개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악게릴라전법이 주가 되고 있다.

전국시대에 급격히 발달한 닌자술은 에도시대가 들어서고 일본내의 전쟁이 없어지자 급격히 쇠퇴했다. 토쿠카와 이에야스는 이가(伊賀)와 코가(甲賀)의 닌자들을 에도(지 금의 토오쿄오지역)로 이주시켜 에도성의 경비를 맡기며 일부는 각 지역의 대명(大名, 다이묘)의 동태를 감시시켰다. 연보(延寶, 1673년-1680년)연간에는 닌자술을 집대성한 『만천집해 万川集海』,『정인기正忍記』가 출간되었다. 이런 책들이 나온 자체가 이미 닌자술이 필요없어졌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