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는 여러 방면에서 특유의 정체성을 보여 왔어요. 다른 나라들은 독립을 위해서 피를 흘립니다. 우리는 '피'가 아니라 '투표'를 통해 독립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건 대단한 축복이에요. 이번에 안 돼도 스코틀랜드는 다음 백 년, 그리고 그 다음 백 년을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다소 결기에 차 이야기 하던 그는 투표결과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예상할 수 없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장애인으로 산다는 건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나에겐 가족도 안정적인 직장도 나름 즐길 취미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남들과 같지는 않다. 내 눈을 고칠 수 있는 특별한 의술이 나오지 않는 이상 내 삶의 외형적 형태가 일반적인 사람들과 같아질 수는 없다. 누군가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 행복이라면 장애인 누구도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몇 안 남을 것이다.
일찍이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적선이란 걸인으로 하여금 그 빈궁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게 아니고, 도리어 그 빈궁상태를 연장하여 주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적선에 반대했습니다. 일면 타당합니다. 그런데 모두 그렇게 적선에 반대하고 국가도 내몰라 하면, 걸인들 중에선 일부는 일자리를 찾아 나서겠지만 굶어죽는 사람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니 실제 오늘날 걸인들 중에선 굶어죽지는 않더라도 영양실조에 걸리고(그래서 천천히 죽어가고), 겨울에는 얼어 죽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과연 웨어러블 컴퓨터의 총아 스마트워치는 스마트폰를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답은 "그렇다"이다. 여러분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스마트워치 자체로는 그만한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웨어러블 컴퓨터가 창조하게 될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보 생산자로서의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만약 크레용팝이 정말로 일베를 이용해서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장논리에 기인한 것이지 크레용팝이 일베의 내용을 내면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크레용팝이 일베라는 내용을 내면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크레용팝이라는 아이돌 상품이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을 협소하게 만드는 자충수일 뿐이다. 실제로 크레용팝은 일베와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제 우리는 크레용팝이 얼마 전에 열렸던 금융노조 총파업에서 왜 공연을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크레용팝에게 총파업이라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연을 통해서 산출되는 경제적 가치가 중요할 뿐이다.
바야흐로 막말의 시대다. 세월호 사태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막말의 홍수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막말도 박근혜의 침묵보다 더 지독하진 않다. 추석달 아래 자식을 가슴에 품은 부모들이 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있건만 박근혜는 침묵으로 일관중이다. 박근혜의 침묵은 지방선거 전 세월호 사태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약속한 박근혜의 발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한국사회를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나는 박근혜로 인하여 침묵이 가장 무서운 막말일 수도 있음을 알았다.
황용주와 이병주는 여러 관점에서 학병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학병 경력자 중에 장준하, 김준엽, 신상초 세 사람이 쓴 "3대 탈출기"는 극적인 상황을 후세에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러나 학병에 응소한 4,385명 중 탈출자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절대다수의 학병들의 종전에 이르기까지 전사하지 않는 한 일본군으로 복무했다. '학병탈출기'는 어디까지나 '비상'의 상황을 극적으로 그린 것으로, 학병 전체를 보편적 상황과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학병의 전 과정을 마친 이병주와 황용주의 체험과 기록이 학병세대 기록의 정전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높다.
지금 일본의 최대 이슈는 인구 감소다. 이미 2009년부터 5년째 총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현재 1억 2800만명인 인구는 2050년이 되면 1억 이하로 떨어진다. 인구의 30%가 감소하는 셈이다. 인구가 30% 감소하면 소비는 더 크게 감소한다. 2050년이 되면 음식 등 필수 소비재는 4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 신차 수요는 2030년에 이미 30% 가까이 감소할 전망이다. 이미 주택의 14%는 빈집이다. 한국의 총 인구는 2030년부터 감소한다고 한다. 일본과 20년 정도 격차가 난다. 그렇다 보니 아직까지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일본을 본다. 정부도, 기업도, 지자체도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없다. 상상하기 싫은 문제는 다음 세대로 떠넘긴다. 과연 20년 후에는 제대로 준비를 할까?
우버의 성공은 인터넷이 슈퍼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으로 전환하면서 자동차 공유 서비스 등이 거의 제로의 한계비용으로 가능해졌다는 것을 보여줬다. 얼마 안 있어 공유차를 이용하는 데 드는 노동력의 한계비용마저도 제로에 가까워질 것이다. 사물인터넷에 연결된 무인 자동차가 운전자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동차 공유 서비스는 제로 한계비용 산업에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떠오르는 공유 시스템을 통해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집, 아파트, 옷, 그리고 다른 재화와 서비스를 거의 제로에 가까운 한계비용으로 공유할 것이다.
나 역시 부동산시장이 멜트다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주택 가격이 충분히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결혼해서 새로 가정을 꾸리려는 사람들은 피부로 절감하겠지만 우리의 평균소득수준에 비해 주택가격은 너무 높은 편입니다. 주택가격이 오르면 국부가 증가되는 것 같은 착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장기불황 시작 직전의 일본인들이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한 재산 증가는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달은 자전주기와 공전주기가 같기 때문에 지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따라서 우리는 토끼가 방아를 찧는 모습이 새겨진 한 면만을 늘 본다. 그래서 인류가 달의 뒷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은 1959년 소련의 무인탐사선 루나 3호가 달의 궤도를 돌며 첫 사진을 보냈을 때에 이르러서였다. 까마득한 옛날 지구에 박테리아가 처음 나타난 이래로, 지구에 사는 생명체가 달의 뒷면을 한 번 보는 데 장장 35억년이나 걸린 셈이다. 지금은 거듭된 유무인 탐사선의 조사로 달의 앞면과 뒷면 모두 정확한 지도가 작성돼 있고, '구글 문' 서비스를 통해 일반인도 접근이 가능하다.
슬슬 초승달이 두툼해지니, 추석이 다가오는가 싶다. 추석이 다가오니 또 슬슬, 경기가, 민생이, 경제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바뀐 것도, 개선된 것도 하나도 없다. 하물며 광역버스 입석 금지도 흐지부지 도로아미타불이다. 유가족은 왜 사고가 났나며, 왜 못구했냐며 길바닥에 나앉아 있다. 그런데 다시, 돈만을 경제만을 이야기한다. 모든 걸 제쳐두고 잘 살아보기에 매진해 온 여태까지처럼. 사고 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다 잊은 것처럼.
최근 전자책이 인기가 높아지면서 종이책의 생존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많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런 논의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다. 아니 소모적이라는 생각이다. 독서라는 행위가 꼭 '책'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물건으로만 해야 된다는 법은 없다. 독서의 본질적인 목적은 '정보의 취득'에 있지 '정보 취득의 도구'에 있지 않다. 정보 취득의 매개체는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즐기고, 필요한 정보를 얻기만 하면 그게 바로 '독서'다.
<유나의 거리>에는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드라마 속 소매치기, 깡패, 도둑 등 뒷골목 인생들이 거쳐 온 보육원, 생각하기도 싫은 곳.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하던 2012년 겨울 보육원 아이들의 한 끼 식비가 1,500원밖에 안 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식비 현실화를 위한 모금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었다.
"부부는 서로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켜보다가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고요. 저희 부부는 아이들에게 절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요. 단,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차이'를 인정하는 법은 가르치려 애씁니다. 그리고 연애나 결혼의 상대로는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라고 하지요. 한국인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제가 죽도록 사랑하는 느낌이 들어 결혼하자고 했더니 '나 돈 많이 못 벌 텐데 괜찮겠어?'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죠. 결혼하고 돈 많이 버는 거하고 무슨 상관인 건지"
서양음악사 최고의 두 작곡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만남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베토벤은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서 그 곳을 떠나야 했고, 1792년이 되어서야 그는 다시 비엔나로 올 수 있었다. 알다시피, 모차르트는 1791년 겨울에 (지금은 그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알 길 없는) 도시의 외곽 묘지에 묻혔고, 런던에 있던 모차르트의 친구 하이든은 몇 개월 뒤에야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인지상정이란 말은 흔해빠진 말이지만, 정말 중요한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인정 또는 생각"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 이 말이 엄청난 위기 앞에 서 있다. 수십 일을 단식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마를 기미도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려가며 거리에서 잠드는, 비정상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저 사람들이 비정상인가? 아니면 자식을 잃은 사람을 두고 보상금 운운하는 사람들,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비정상인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딸)와 싫어하는 아이(아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책이라면 다 읽어 치우는 반면 큰 아이는 도무지 책 읽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가끔 TV에 교육학자가 나와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려면 부모들이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전문가다운 말을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책 읽기라면 나와 남편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모범이 될 만했다. 우리집에는 잠 자는 머리맡은 물론이고 화장실 거실 부엌 구석구석 책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부모들이 책을 안 읽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말짱 헛말이라는 생각이 들 밖에...
아뿔싸! 학교 밖에서, 이를테면 전국을 순회하면서, 현 정부의 대학구조조정 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던 중에, '나의 대학'인 덕성여대가 대학살생부라고 불리는 "정부재정지원제한 대학"에 끼고 만 것이다! 마치 큰 싸움이 벌어진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이에 고향마을이 적의 습격을 받은 것 같이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되었던 이 제도가 막을 내리는 마지막 해에, 불운하게도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교육부의 강압적이고 비교육적인 기업식 구조조정 정책의 희생물이 어찌 덕성여대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