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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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제도
Falkland Islands
Islas Malvinas
Flag of the Falkland Islands.svg Coat of arms of the Falkland Islands.svg
국기 국장
표어 Desire the right
국가 포클랜드 제도의 국가
Falkland Islands on the globe (zoom) (Chile centered).svg
수도 스탠리 남위 51° 41′ 32″ 서경 57° 51′ 32″ / 남위 51.6921° 서경 57.8589° / -51.6921; -57.8589
정치
공용어 영어
 
지리
면적 12,173km² (--)
내수면 비율 -
시간대 (UTC-4)
DST 없음
인구
2003년 조사 2,967명 (--)
인구 밀도 0.24명/km² (--)
경제
통화 파운드 (FKP)
기타
ISO 3166-1 238, FK, FLK
도메인 .fk
국제 전화 +500

포클랜드 제도(Falkland Islands)는 남대서양에 있는 군도이다.

아르헨티나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영토 분쟁 지역이다. 현재는 영국의 실효지배 상태에 있다. 아르헨티나 및 스페인어권에서는 말비나스 제도(스페인어: Islas Malvinas 이슬라스 말비나스[*])라 부른다.

영국-아르헨티나 간의 영토 분쟁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불씨가 되어 아르헨티나 군이 침공해 몇 달 동안 포클랜드 제도를 점유하기도 했다. 말비나스라고 하는 것은 이 곳에 처음으로 도착한 이들이 프랑스생말로 주민이었기에, 프랑스어로 '생말로'의 혹은 '생말로 주민'을 뜻하는 말루인 섬(프랑스어: Ile Malouines 일 말루인[*])이라고 부른 것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것이다. 포클랜드 제도에는 포클랜드 늑대가 서식하였으나, 지금은 멸종되었다.

역사[편집]

최초의 발견과 상륙[편집]

포클랜드 제도의 최초의 발견자에 대한 것부터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쪽 주장은 엇갈린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6세기포르투갈스페인 사람으로 구성된 마젤란 탐험대가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아르헨티나스페인의 식민지였으니 그 연장선 상에서 역사를 풀어보려는 의도다.

영국에서는 또 그들 나름대로 16세기영국의 항해사 존 데이비스가 최초라고 주장한다. 영국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그래서 존 데이비스를 이 제도의 최초 발견자로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사실 양측의 주장 모두 다 문서로 확인된 기록은 없다.

반면, 포클랜드 제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상륙자는 17세기영국 탐험대라는 것에는 논란이 없다. 포클랜드라는 이름도 이 탐험대가 포클랜드 자작이라는 당시 해군관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아무튼 영국이 먼저 포클랜드 제도에 발자국을 남긴 '기록'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1]

최초의 정착[편집]

처음으로 포클랜드 제도에 정착한 것은 1764년 프랑스인들이다. 그러나 1766년, 프랑스 정착민들은 보상을 받고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권리를 스페인에게 양도 한다. 그러나 이와는 상관 없이, 1766년부터 영국인들이 포클랜드 제도에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때 양측이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4년 뒤 앞서 세운 영국의 기지를 발견한 스페인인이 침공해서 점령했으나, 다음해 영국에 반환했다. 그러다가 1774년 경제적인 문제로 퇴거하면서 영유권을 표시하는 명판을 남겨두었다. 스페인 역시 죄수 캠프로 섬을 이용하다가 중도에 철수했다.

분쟁의 시작[편집]

1816년 아르헨티나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독립 당시에는 포클랜드 제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1826년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이 아르헨티나에 귀속된다고 공식 선언한다. 1828년에 아르헨티나는 독일 상인을 파견해서 관리한다. 그런데 독일 상인이 불법적으로 어선을 나포하고 해적질하자 자국 어선에 대한 해적질을 처단하고자 미해군이 독일 상인의 기지를 포격해서 파괴한다. 1833년 영국은 해적 행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변 해역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전함을 보내서 포클랜드 제도를 군사력으로 점유한다.

이때 영국이 아르헨티나 식민자들을 내쫓았다는 주장이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 소스에서 영국 측이 오히려 식민자들에게 남을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부정되고 있다. [2]

분쟁 해결을 위한 노력[편집]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권리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으로서는 자신들이 최초로 상륙하고 자국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를 되찾았다는 입장이었다. 영국에 접수된 이후, 이 제도는 100여년간 영국에 의해 평화적으로 점유된다. 영국에 의한 점령기간 중, 약소국 아르헨티나는 최강국 대영제국을 상대할 수 없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후 전 세계적인 탈식민지화 추세에 따라 1946년 아르헨티나가 다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1965년 유엔총회는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결의 2065/XX)를 채택했다. 영국계 주민들이 대다수였던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했다. 1973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한다. 유엔총회는 양국이 분쟁해결을 위한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할 것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후 1982년 2월까지 꾸준히 협상이 지속됐으나, 영국으로서는 이 협상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고, 1982년 3월, 아르헨티나 외무부는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며, 협상이 신속히 진행되지 않으면 더 이상 협상할 수 없고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한다. 이후 양국간에 긴장감이 높아지게 된다. 중남미의 모든 국가들은 포클랜드 제도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영토로 인정하고 이를 반대하는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상태에서 미주지역 국제기구를 창설하는 것에 최종 합의를 했다.[3]

포클랜드 전쟁[편집]

포클랜드 전쟁1982년 4월 2일에 발발하였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이 섬을 불법점거하고 있다며, 말비나스 제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하였다. 침공의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영유권 협상을 진행해봤자 이익이 없으며 또 더 이상 진행하고 싶지 않았던 영국의 소극적인 협상태도라는 설도 있고, 아르헨티나의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의 추락하던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 국제적 주목을 받고자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영국군의 포클랜드 제도 주둔군이 줄어들었던 요인도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국제연합 상임이사회는 결의안을 발표하고 아르헨티나가 제도 전체에서 군병력을 철수할 것과 외교적 대안을 양국이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칠레, 콜롬비아를 제외한 전 국가가 아르헨티나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한편 영연방과 아일랜드는 영국 정부를 지원하고 나섰다. 결국 미국까지 가세하게 되고 영국은 구원병을 포클랜드 제도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여 포클랜드 전쟁이 본격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영국 해공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5월 21일 산 카를로스 해안에 이르렀고 6월 14일 아르헨티나 군은 결국 항복하였다. 아르헨티나 군의 패배의 원인은 전투기의 성능상의 문제였는데 아르헨티나 공군 주력기 미라쥬는 영국 공군 주력기인 해리어보다 성능상에서는 훨씬 뛰어났지만 문제는 미라쥬를 띄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길고 넓은 활주로가 필요한 반면 해리어는 수직 이착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공군전에서 영국에 밀려[4]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은 즉각 포클랜드 제도에 병력을 증강하였다. 아르헨티나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갈티에리 정부는 실각(失脚)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와 영국 당국은 1989년 외교적 협상을 게시하였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도 없고 협상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에 사는 주민들의 '자결권'에 따라, 주민들의 의사에 의해 포클랜드 제도의 귀속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고,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의 역사적 승계성을 주장하며,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포클랜드 제도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의 귀속여부는 거주민의 의사(意思)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영제국이 1833년 군사력을 써서 이 섬의 아르헨티나계 주민들을 축출하고 영국계 주민들로 채웠기 때문에, 자결권 주장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의 여지는 남아있다. 현재 이 섬은 거의 영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하고 있다.

영국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는 이유가 대서양과 남극에 있는 무궁무진한 지하 자원과 특히 얼음 상태로 잔존해 있는 물을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실제 남극에서 얼음 상태로 존재하는 물은 전 지구에 존재하는 담수(淡水: 바닷물을 제외한 물)의 90%에 달한다. 이후 1995년에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상호 협약을 통해 포클랜드 전쟁으로 악화된 양국간의 외교를 회복하기도 했다. 그 협약의 내용 중에는 아르헨티나와 영국 간의 상호 자원개발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영국은 아르헨티나와의 협약을 무시하고 포클랜드 제도 일대의 대서양에 매장된 석유를 일방적으로 불법 채취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5]

영유권 문제[편집]

포클랜드/말비나스 제도에 대한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에 국제사회는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중립을 지키고 있다.

영연방 국가들은 이 제도에 대한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들 중 카리브 공동체 국가들은 최근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함을 밝혔다.[6][7] 유럽연합은 이 곳을 회원국의 특수해외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페루는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포클랜드 전쟁 중 물자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외 브라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우루과이 등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과 해당 지역기구인 메르코수르(MERCOSUR), 남아메리카 국가 연합등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칠레는 포클랜드 전쟁 중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임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8][9]. 유럽연합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주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다[10].

미합중국은 1940년대 이래 공식적으로 이 제도의 영유권주장에 대해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 중에는 영국에 대해 물자 및 정보지원을 실시했다[11]

이 제도에 대한 국제연합(UN)의 수십 년 된 입장은, 중립적 관점에 의거하여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이 이 문제에 대해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연[편집]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섬으로, 12,173㎢의 면적에 서(西)포클랜드와 동(東)포클랜드 섬 및 주위 776개 섬으로 이루어졌다. 중심지인 스탠리와 영국군 기지는 동포클랜드에 있어,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다. 해양성 아남극(亞南極) 기후로 비교적 냉량(冷凉)한 편이다. 여름인 1월의 평균기온은 13 °C (55 °F), 겨울인 7월의 평균기온은 4 °C (39 °F) 가량이다. 평균 연간강수량은 573.6mm로 동포클랜드가 서포클랜드보다 습윤한 편이다.[12] 습도가 높고 바람도 비교적 강한 편이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나, 많이 쌓이지는 않는다. 강풍은 흔한데, 특히 겨울에 많다.[13] 이 제도의 기후는 영국의 셰틀랜드 제도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강수량은 더 적고 겨울에 좀 더 춥다.[13]

지리[편집]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으로부터는 12,173km이나 이격되어 있는 반면 아르헨티나로부터는 아르헨티나의 티에라델푸에고 섬의 북동쪽으로 400km정도 이격되어 있다.

각주[편집]

  1. 이보다 더 고대에 남미인이 상륙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기록상 최초의 상륙은 영국인이다
  2. Lewis, Jason; Inglis, Alison. "Part 3 – Louis Vernet: The Great Entrepreneur". A brief history of the Falkland Islands. falklands.info. Retrieved 19 July 2007.
  3. <국제뉴스 브리핑> 중남미, 미.캐나다 제외 국제기구 창설 합의
  4. 실제 미라쥬의 활강속도는 음속 마하2의 속도였으나 해리어는 음속 미만이었다.
  5.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int&arcid=0920493106&cp=nv
  6. “Microsoft Word – Declaracion_Malvinas_en” (PDF). 2010년 3월 15일에 확인함. 
  7. “Caribbean Daily News, ''CARIBBEAN: Former diplomat concerned about region’s stance on Falklands'', 26 February 2010”. Caribbeandailynews.com. 2010년 2월 26일. 2010년 6월 9일에 확인함. 
  8. CHILE REAFIRMA SU POSICIÓN SOBRE ISLAS MALVINAS. Ministerio de Relaciones Exteriores de Chile. 18 August 2004
  9. La OEA convocó a resolver "sin demoras" el conflicto por Malvinas. La Capital. 9 June 2004
  10. Ministry of Foreign Affairs,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Mfa.gov.cn (2010-07-13). Retrieved on 2011-11-20.
  11. Lawrence Freedman (2005). 《War and diplomacy》. The Official History of the Falklands Campaign. Vol II. Abbingdon: Routledge. 379쪽. ISBN 0-7146-5207-5. 
  12. Visitorfalklands.com
  13. “Falkland Islands”. BBC News. 22 March 2011. 18 August 2011에 확인함. 

함께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