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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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디어 : 우부룬디 공화국
프랑스어 : 부룬디 공화국
룬디어: Repubulika y'Uburundi
프랑스어: République du Burundi
Flag of Burundi.svg Coat of arms of Burundi.svg
국기 국장
표어 룬디어: Ubumwe, Ibikorwa, Amajambere
프랑스어: Unité, Travail, Progrès
(통일, 노동, 진보)1
국가 우리의 부룬디
Burundi on the globe (Zambia centered).svg
수도 부줌부라 남위 3° 23′ 00″ 동경 29° 22′ 00″ / 남위 3.383333° 동경 29.366667° / -3.383333; 29.366667
정치
공용어 룬디어, 프랑스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공화국
대통령
제1부통령
제2부통령
피에르 은쿠룬지자
Therence Sinunguruza
제르베 루피키리
역사
독립 벨기에로부터 독립
 • 독립 1962년 7월 1일
지리
면적 27,830km² (146 위)
내수면 비율 7.8%
시간대 CAT (UTC+2)
DST 사실상 (UTC+2)
인구
2005년 어림 7,548,000명
1978년 조사 3,589,434명 (94위)
인구 밀도 206.1명/km² (43위)
경제
GDP(PPP) 2005년 어림값
 • 전체 $55.38억 (148위)
 • 일인당 $627 (163위)
HDI 0.355 (178위, 2012년 조사)
통화 프랑 (BIF)
기타
ISO 3166-1 108, BI, BDI
도메인 .bi
국제 전화 +257

11966년까지는 "Ganza Sabwa"(간자 사브와)

부룬디 공화국(부룬디共和國, 룬디어: Repubulika y'Uburundi 레푸불리카 유부룬디, 프랑스어: République du Burundi 레퓌블리크 뒤 부룬디[*]), 줄여서 부룬디(룬디어: Uburundi 우부룬디, 프랑스어: Burundi 부룬디[*]) 또는 우룬디아프리카에 있는 공화국이며 수도부줌부라이다. 우간다, 르완다, 콩고 민주 공화국, 탄자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원래는 부룬디 왕국(프랑스어: Royaume du Burundi)이었으나 1966년군주제가 폐지됨에 따라 부룬디 공화국(룬디어: Republika y'Uburundi 레부블리카 유부룬디)이 되었고, 1992년 헌법 개정 때 룬디어 국명의 철자가 약간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역사[편집]

1962년부룬디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였으나 1966년에 지금의 공화정이 되었다.

이 지역의 최초의 거주자는 피그미족인 트와족이다. 그들은 반투족의 이주 도중에 반투민족에 대부분 대체되고 흡수되었다.

부룬디는 16세기부터 독립 왕국으로 존재하였다. 1903년 부룬디는 독일 식민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벨기에에 넘어갔다. 부룬디는 1923년 벨기에에 의한 국제연맹의 루안다-우룬디 위임 통치령의 일부였고, 이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뒤 벨기에 행정부에 의한 유엔 신탁통치를 받았다. 부룬디 군주제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왕조의 창시자인 은타 레 루샤치가 17세기에 르완다로부터 부룬디에 왔다고 한다. 따른 보다 믿을 만한 출처에 따르면, 은타레는 동남쪽의 부하로부터 왔고 은코마 지역에 그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1966년 군주제의 몰락 때까지, 왕정은 부룬디를 그 과거와 연결해주는 마지막 연결 고리로 남아 있었다.

1962년의 독립 때부터 1993년의 선거까지, 부룬디는 연이은 군부 독재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그들 모두는 소수민족인 투치족이었다. 이 기간 동안 1964년과 1980년대 후반의 주요 분쟁, 그리고 1972년의 부룬디 인종 청소를 포함한 광범위한 인종 폭력이 있었다. 1993년 부룬디는 최 초의 민주 선거를 치렀는데, 여기서 후투족 중심의 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가 승리하였다. FRODEBU의 지도자 멜콰이어 은다다예는 부룬디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이 되었으나, 수 개월 뒤 투치족 장교 그룹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이 죽음은 부룬디를 심한 내전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은다다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무수한 투치족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투치족 위주의 군대는 비슷한 수의 후투족을 학살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이러한 불안정의 시기는 1996년 이전 대통령 피에르 부요야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2000년 8월, 두 개의 정치 그룹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한 평화 협상은 민주정치의 부활을 위한 일정을 계획하였다. 수 년의 폭력이 더 계속된 뒤에, 2003년 부요야의 정부와 가장 큰 후투족 반군 그룹인 CNDD-FDD 간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그 후 FRODEBU 지도자 도미티엔 은다이지예는 부요야의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가장 극단적인 후투족 그룹 Palipehutu-FNL (일반적으로 "FNL"로 알려져 있다)은 아직 협상을 거부하였다. 2004년 8월 이 단체는 부룬디 서부의 가툼바 난민 캠프에서 152명의 콩고계 투치 난민을 학살하였다. 이 공격에 대한 반응으로 부룬디 정부는 FNL 지도자 아가톤 르와사와 파스튀르 하비마나에 대하여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테러단체로 규정하였다.

2005년 5월, FNL과 부룬디 정부간에 마침내 휴전이 합의되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재개된 협상은 FNL이 무기를 내려 놓는 댓가로 포괄적 사면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 현재 진행 중이다. 2005년 중반의 일련의 선거에서 이전의 후투 반군인 National Council for the Defense of Democracy-Forces for the Defense of Democracy (CNDD-FDD)가 승리하였다. 2006년 9월 7일, 두 번째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인종 청소와 대량 학살[편집]

1972년 부룬디에서는 후투족들에 대한 계획된 인종청소가 있었고, 그 결과 250,000명으로 추산되는 후투족과 온건 투치족이 죽었다. 인종 청소에 참여한 사람들은 현 부룬디 정부가 모든 살인에 대하여 서로를 용서하도록 지속적으로 설득한 이후 석방되었다. 부룬디에서는 후투족에 대한 다른 대량 학살도 있었다. 1988년 정부는 은테가와 마랑가라 지역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하였다. 1993년 부룬디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후투족 대통령 멜콰이어 은다다예는 투치족 극단주의자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그의 암살은 후투와 투치 모두를 죽인 긴 내전으로 이어졌다. 1996년 은다다예의 암살과 그 여파에 대한 UN 보고서는 "소수파인 투치에 대한 인종청소는 1993년 10월에 자행되었다"고 결론내렸다. 이 보고서는 또한 투치족 위주 군대의 상급 거물들이 암살과 관련있음을 밝혔다. 부룬디에서 후투족투치족 시민들 모두는 국가와 무장된 시민군들에 의해 조직된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의 대상이었다. 군대는 이전의 후투족 반란군과 투치족 정부군 모두로 이루어져 있다. 다인종, 다당제 민주정치의 회복은 부룬디의 갈등의 종결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지리[편집]

부룬디의 지도
부룬디 지역을 촬영한, 미 항공우주국의 위성 사진.
부룬디 및 주변 지역을 찍은 위성 사진.

부룬디는 적도성 기후를 가진 육지로 둘러싸인 국가이다. "아프리카의 심장"으로 불리며, 남서쪽에는 탕가니카 호수와 맞닿는 고원에 있다. 중앙 고원의 평균 고도는 5,600 feet이며, 국경에서는 이보다 낮다. 2,685m (8,809 feet)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카론제 산은 수도 부줌부라의 남동쪽에 있다. 남동쪽과 남쪽 궁격은 대략 1,370m 정도이다. 탕가니카 호수의 북쪽 루지지 강을 따라가는 좁고 긴 땅은 유일하게 3,000 feet (915m)보다 낮은 지역이다. 이 지역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서쪽 확장인 알버틴 단층의 일부를 형성한다.

땅은 대부분 경작지 또는 목초지인데, 이렇게 만듦에 따라 산림 벌채, 토양 침식, 서식지 상실이 일어났다. 산림 벌채는 인구의 지나친 증가에 따라 전 국토에 걸쳐 일어나서 단지 60,000헥타르 정도만이 남았으며 지금도 매년 약 9%씩 진행되고 있다. [1] 국립 공원은 두 개 있는데, 북서부의 키비라 국립 공원(르완다의 Nyungwe Forest 국립공원과 인접한 저산대 우림)과 북동부의 루부루 국립 공원(Rurubu(또는 Ruvubu나 Ruvuvu라 알려진) 강을 따라 있다.)이다.

나일 강의 가장 먼 원류는 부룬디에 있다. 비록 빅토리아 호가 일반적으로 나일 강의 수원으로 생각되지만, 카가라 강은 빅토리아 호에 이르기 전 690km를 흐른다. 카가라 강의 상부 지류 루비론자 강은 부룬디의 키키지 산에 있다.

행정 구역[편집]

부룬디의 주

수도부줌부라이다. 부룬디는 18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기후[편집]

브룬디는 적도 지역의 전형적인 기후를 띤다. 보통 평균 기온은 23 °C에서 17 °C 로서 평균 고도가 1,700m에 육박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연간 평균 강수량은 1,500 mm이며 2월에서 5월, 9월에서 11월이 우기이다. 6월에서 9월, 12월, 1월이 건기이다.

정치[편집]

이 나라는 1962년에서 1966년까지는 군주제 국가였으나 현재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주민[편집]

이 나라의 주민은 후투족이 85%를 차지하며 투치족이 14%를 차지한다. 나머지 1%는 트와족이 거주한다.

언어[편집]

국민의 대부분이 룬디어(키룬디어)를 사용한다.

내전을 종식한 이후 마련한 2004년의 헌법(2005년 국민투표로 확정) 5조에 "국민어는 키룬디(Kirundi)어다. 공용어는 키룬디와 국회에서 지정한 모든 다른 언어다. 법률의 텍스트는 룬디어 원본을 가져야 한다." 고 하여 국민어의 위상을 헌법조문에 내세웠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고유어인 룬디어가 공식적 상황에서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못하는 현상황을 반증한다고 할 것이다. '국회에서 지정한 언어'는 프랑스어를 지칭하는 것이다. 프랑스어는 법적으로 명시한 공용어는 아니지만 사실상 공용어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나라는 국제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미국은 전략적으로 르완다의 사례를 본받아 부룬디와 콩고민주공화국영어사용국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종교[편집]

종교는 기독교가 67%, 현지 고유의 종교가 23%, 이슬람교가 10%이다.

교육[편집]

이 나라는 문맹률이 높은 편이다. 2003년 통계 당시 HDI에 의하면 0.378로 169위를 차지했다.

경제[편집]

나라농업중심으로 하고 있다. 현재 부룬디의 1인당 GDP는 단돈 90달러로 세계에서 제일 적다.

문화[편집]

포크송과 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화유산은 왕권의 미덕을 칭송하는 것이 많으며 투치족의 민속무용은 세계적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전통놀이와 음주를 즐기며 전통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대외 관계[편집]

남북 동시 수교국이다.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고, 1991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수교하였다.

2015년 현재 부룬디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NGO는 텐포원(Ten for One), 휴먼인러브(Human in Love), 하트하트재단(Heart to Heart Foundation)이다. 부룬디 내 한국교민은 10명 내외이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