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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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노년의 토머스 에디슨
노년의 토머스 에디슨
출생 1847년 2월 11일(1847-02-11)
미국 미국
오하이오 주
사망 1931년 10월 18일 (84세)
미국 미국 뉴저지 주, 웨스트 오렌지 시티
국적 미국 미국
출신 대학 無(독학)
주요 업적 에디슨 효과
서명 Thomas Alva Edison Signature.svg

토머스 앨바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년 2월 11일 ~ 1931년 10월 18일)은 미국발명가사업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사람으로 1,093개의 미국 특허가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토머스 에디슨은 후에 제너럴 일렉트릭를 건립하였다.[1]

생애[편집]

출생 및 성장 과정[편집]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나 미시간 주 포트 휴런에서 자랐다. 에디슨은 유년시절부터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당시의 주입식 교육에 적응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3개월 뿐 이었으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에 의해 점차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편집]

에디슨은 집이 가난하여 어렸을 때 기차에서 사탕과 신문을 파는 직업을 잠깐동안 가졌다. 기차에는 화물칸이 있기에 그곳에다가 조그마한 자기만의 연구실을 차려놓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실에 불이나고, 기차의 관계자들은 에디슨을 내쫓으면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때 맞은 부분이 귀인데, 그 이후로 에디슨은 청각 장애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모르스부호를 이용한 유선전신이 이용되던 시대였는데 신문을 팔던 에디슨은 뉴스가 유선전신을 타고 전달되는 것에 흥미를 느껴 전신기사가 된다. 하지만 하루종일 뉴스가 오기를 대기해야하는 전신기사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오히려 자신이 사용하는 유선전신시스템의 구조에 흥미를 느껴 결국 전신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가만든 4중전신기는 하나의 전선을 4명의 전신사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신기술인데 이를 통해 큰 돈을 벌게된다.

연구소 설립[편집]

전신기 특허로 큰 돈을 번 그는 1876년 세계 최초의 민간 연구소로 알려진 멘로파크연구소를 세워 발명을 계속하였다.[2] 그의 발명은 굉장히 많아서 특허의 수효만도 1,300여 개나 된다. 에디슨의 발명품으로는 1874년 자동 발신기 개발, 1877년 축음기개발, 1879년 전화 송신기개발, 1880년 신식 발전기와 전등 부속품개발, 1881년 전차의 실험을 했고, 1882년 발전소 를 건설했고, 1888년 영화의 제작방법을 알아냈고, 1895년 광물을 가려내는 방법, 1900년 시멘트 공업의 개량, 1909년 엔진형 개발, 축전지개발 등이 있다. 흔히 노력형 천재라고 알고있으나 의외로 상당히 틀린 부분이 많다. 이 중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문은 역시 도시의 밤을 환하게 했다는 것이다. 전구의 발명은 발전, 송배전 부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고 각 가정마다 전기가 들어가게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너럴 일렉트릭[편집]

제너럴 일렉트릭은 에디슨이 세운 전기조명회사를 모태로 한다

에디슨 효과[편집]

3극 진공관 발명의 기초가 되어 라디오 발명의 길을 열어 준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을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에디슨 효과를 에디슨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가족관계[편집]

에디슨은 한평생 발명/사업에 힘써왔지만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홀했다. 첫째 부인은 쓸 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구박했고 대학교육에 대한 컴플렉스 탓에 자식들을 공과대학을 제외한 그 어떤 대학에도 보내지 않았다.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이 죽었을 때 일이 바쁘다며 장례식도 가지 않았다고 하며, 그 후 한동안 적적하게 지내다 두 번째 부인이 된 미나 밀러에게 모스 부호로 프로포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족에 소홀했던 탓인지 자식들의 삶도 좋지 못했다. 첫째 아들 토머스 주니어는 '전기 활력 회복기’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이었고, 둘째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주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윌리엄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았는지 주 40달러 가지고 어찌 사냐고 시도때도없이 편지를 보내 에디슨을 닦달했다는 것이다.[3]

다만 셋째 아들 찰스 에디슨은 정계로 진출해 훗날 뉴저지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공헌[편집]

당시의 미국의 과학기술은 유럽에 비해 내세울게 없었다. 특히 유럽의 물리학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퀴리 부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 천재적인 학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비약적인 발전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변방이었다. 비록 에디슨은 학자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실험과 호기심을 통한 발명으로 미국을 응용기술면에서 유럽을 압도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조[편집]

  1. Edison's Patents (htm) (영어). 《Rutgers》. 2009년 3월 23일. 2009년 4월 22일에 확인함. 
  2. 《코카콜라는 어떻게 산타에게 빨간 옷을 입혔는가》에디슨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멘로파크 연구소/김병도 지음/21세기 북스
  3. 이게 뭐가 문제냐면 당시 매주 40달러가 거저 들어온다면 어지간한 회사원과 동급의 수입이 그냥 들어왔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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