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죽미령 전투

개전초기-오산개전초기오산전투지도
일어난 시기: 
1950.7.5
일어난 곳: 
경기도 오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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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산 죽미령 전투의 개요

북한군이 서울을 탈환한 다음, 제 2차 침공을 개시함에 따라 한국전선에 적극 개입키로 한 미행정부의 조치와 더불어 그 지상군 선발대가 최초로 출동하여 오산 부근에서 싸우게 된 전투가 오산 죽미령 전투이다.

2.오산 죽미령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미 제 24사단장 소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겸 주한 미 지상군 사령관)

동부사령관 준장 존 처치(John H. Church)

포병사령관(임시) 준장 조지 바스(George B. Barth)

제 21연대장 대령 리차드 스테픈스(Richard W. Stephens)

특수 임무부대장 중령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

B 중대장 중위 찰스 토마스(Charles Thomas)

C 중대장 대위 리차드 다쉬머(Richard W. Dashmer)

배속부대

제 52 포병대대장 중령 밀러 페리(Miller O. Perry)

A 포대장 중위 드웨인 스코트(Dwain L. Scott)

지원부대 제 17연대장 대령 백인엽(7. 3 부상)

중령 김희준(7. 4부터)

제 1대대장 소령 이관수

제 2대대장 소령 송호림

제 3대대장 소령 오익경

*적군

북한군 제 3사단장 소장 이영호

제 7연대장 대좌 김창봉

제 8연대장 중좌 김병종

제 9연대장 대좌 김만익

포병대장 대좌 안백성

제 4사단장 소장 이권무

제 5연대장 대좌 최인덕

제 16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 18연대장 대좌 김희준

제 105기갑사단(7. 5 승격)장 소장 유경수(제 1087전차연대 기간)

3. 오산 죽미령 전투의 진행과정

미 제 24사단 선발대로서 부산에 공수된 스미스(Smith) 특수임무부대는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7월 1일 20:00시경에 부산역을 출발하여 7월 2일 08:00시경에 대전에 도착했다. 극동 미군 사령부 전방지휘소에서 처치(John H. Church)장군은 스미스 중령을 반갑게 맞이했다. 지도를 보고 상황을 설명하면서 당부와 함께 임무를 부여했다. “우리는 윗부분에서의 상황이 거의 없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전차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을 사람을 위쪽에 배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을 올려 보내서 한국군을 지원하고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려 한다.” 그의 병사들이 숙영지로 이동할 때 스미스 중령과 그의 참모들은 오산 북방 5km 지점의 죽미령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다행히 적기에 발견되지 않은 채 진지 정찰을 마치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2~3일간 스미스 부대는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진지를 점령했다. 7월 2일 밤기차로 평택과 안성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스미스 중령은 1개 중대는 평택, 다른 1개 중대는 안성에 배치하고 자신의 지휘소는 평택에 위치시켰다. 7월 3일에 이들은 평택에서 아군기가 아군 탄약을 싣고 아군 역에 있는 화물기차를 폭격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수원에 있는 아군을 공격하다가 아군의 소총에 맞아 할 수 없이 수원 비행장에 내려, 아군에 잡힌 아군 조종사에 관한 얘기를 듣기도 했다. 7월 4일에는 LST로 현해탄을 건너온 52 야전포병대대의 일부와 합류한 스미스 부대장은 진지 점령 전 마지막 진지 정찰을 실시하여 위치를 확정지었다.

한편 7월 4일부로 대전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하게 된 24사단장은 당시 전방지휘소(ADCOM)장 처치 장군을 부사령관에 임명하여 본격적인 작전 지휘 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대전에 도착한 24사단 포병 사령관 바스(George B. Barth) 준장을 평택에 보내서 스미스 중령에게 처치 장군에게서 명령을 받은 대로 오산 북방에서 방어를 실시할 것을 다시 지시했다.

7월 15일 03:00시경 명에 따라 방어 진지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부대 배치를 마쳤다. 도로와 철로 사이의 공간에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 중대를, 철로 좌측편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 중대를 배치하고, 75mm 무반동총 1정씩을 각 중대지역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4.2인치 박격포를 B 중대 후방 400야드 지점에 예비로 배치하였다. 52포병대대장(중령 페리(Miller O. Perry))은 보병진지 후방 약 2000야드 떨어진 지점에 5문의 포를 배치하고, 1문의 포는 6발의 대전차 포탄을 주어 보병과 포병진지 중간 언덕에 배치하였다. 그래서 비오는 7월 5일 아침 오산 북방 죽미령 지역에는 540명의 미군(보병장교 17명, 병사 389명과 포병장교 9명과 병사 125명)이 적의 진격을 기다리면서 전투식량으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아침이었지만, 스미스 중령은 수원까지 볼 수 있었다. 07:00시가 조금 지나서 수원 가까이에서 적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나자 똑똑히 식별할 수 있는 전차 대열이 기다리는 미군 병사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08:00시경 8대의 전차가 한 묶음이 되어 굴러오고 있었다. 전방관측 장교는 후방의 포병 진지에 사격임무를 요청했다. 08:18시 2문의 포가 두 발의 고폭탄을 뿜어냈다. 사거리 조정을 마친 포가 계속 포탄을 뿜어냈지만, 적 전차는 멈추지 않고 굴러오고 있었다. 75밀리 무반동총을 감추고 있던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가 700 야드 내에 들어오자 사격 명령을 하달하고, 2.36인치 바주카포도 쏘아댔다. 전방에 추진된 포도 대전차포탄을 쏘아 댔다. 무엇에 맞았는지 적 전차 2대가 멈췄다. 한 대가 불이 나서 타자, 3명의 승무원이 튀어나왔다. 세 번째 튀어나온 북한군 병사는 총을 가지고 미군 기관총 부사수를 쏘아 맞췄다. 최초의 미군 전사자가 한국 전선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들 3명의 북한군 병사는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세 번째 적 전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남쪽으로 향하고 뒤를 이어 총 33대의 전차가 보병 진지를 지나쳐 갔다. 스미스 부대는 대전차 포탄이 떨어지고, 나머지 화기는 적 전차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한국 전선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최초 접전은 이와 같이 진행되어 09:00경에 일단 끝났다.

보병 진지를 지나가는 적 전차를 보낸 미군 병사들은 “아마 저 친구들이 우리들을 못 알아보았기 때문에 지나갔지, 미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면 되돌아 갈 것이다.”라는 생각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후방의 포병에게 적 탱크가 보병 진지를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포병은 대전차 포탄이 아닌 고폭탄으로 탱크에 직접 사격을 실시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 105mm 포가 적 전차의 궤도를 명중했다. 그러자 적 전차는 멈추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튀어나온 북한군 2명의 병사는 52포병 대대장을 부상 시키고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33대의 적 전차는 스미스 부대의 포병 진지까지 통과하면서 4대가 파괴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고 3대가 부서지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산을 향해 남진하고 있었다. 마지막 전차가 지나간 죽미령의 미군 진지에는 다시금 불안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갔을까 하는 즈음에, 스미스 중령은 수원 가까이에서 긴 행렬의 트럭과 보병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비가 끈질기게 쏟아지는 가운데 내려오는 적 보병의 행렬은 약 6마일(10km) 정도였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접근하는 이 보병 행렬은 한 시간 후면 미군의 방어 진지에 도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북한군 4사단의 주력이었다.

적의 호송트럭이 1000야드 전방에 접근했을 때 스미스 중령은 “그들을 엄벌에 처하라(Throw the book at them).'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격포, Cal 50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적 트럭에 불이 붙고, 어떤 적 병사는 공중에 튀어 오르기도 했다. 곧 3대의 적 전차가 접근하여 전차포와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적 병사들은 트럭에서 내려 산개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계는 11:45를 가리키고 있었다. 양측 보병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3시간 동안 싸운 스미스 부대는 포병과의 연락도 이미 되지 않았고, 소총탄도 다 떨어져가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스미스 중령은 우측에 있는 C중대를 먼저 철수시켰다. 그러나 나중에 철수한 B중대의 2소대는 철수명령도 전달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다급하게 철수를 서둘렀다. 부상이 경미한 병사들은 본대와 합류해서 철수 했지만 중상자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 그 후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다. 포병 대대장과 합류한 스미스 중령은 잔류병을 끌고 안성을 통해서 7월6일 천안에 도착했다. 다행히 북한군은 미군이 버린 무기와 탄약, 그리고 전투식량에 만족했던지 스미스 부대를 추격하지 않았다. 철수 명령을 제대로 받지 못한 B 중대원은 며칠 후에 오산에 도착하기도 하고, 어떤 병사는 동해안, 어떤 병사는 서해안에서 조각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기도 했다.

540명의 스미스 부대원 중에서 150여명이 전사하고, 포병대대 소속 장고 5명과 26명은 실종되어 최초로 투입된 미군 부대의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미군이 가진 대부분의 장비는 적의 손에 들어갔으나 적 4사단도 42명의 전사자와 85명의 부상자, 전차 4대를 잃어버렸다. 최초 접전 치고는 쌍방간에 피해가 많았다. 스미스 부대는 이와 같이 많은 사상, 실종자를 내면서 적의 진격을 약 7시간 지체 시켰던 것이다. 7시간을 벌기 위한 인명 피해와 빼앗긴 지역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 진격해 오는 북한군은 미군이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엔의 결의안과 트루먼 대통령의 결의가 현실적으로 전쟁터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4. 오산 죽미령 전투의 결과

이 지연전으로 말미암아 적은 평택까지 진출하려던 기도를 포기하고 이날 18:00에야 수원 남쪽 23km의 서정리 부근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이 당초에 계획한 것보다보다 훨씬 뒤진 진출 속도를 나타낸 것이다. 특히 그들이 이곳에서 미군과 최초로 조우하게 된 상황에 대하여 뒷날 낙동강 선에서 포로가 된 전 북한군 제 2군단 작전참모였던 김학구 총좌의 증언과 그들의 시체에서 나온 일기 수첩을 요약하면 『7월 초에 미지상군이 오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으며 이 전투는 전례 없이 치열하였다.』라고 하여 전선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시인하였다.

 

참고문헌: 

<6·25전쟁사3> pp. 342-367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