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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신카나리아(본명 신경녀)

1912년경에 강원도 원산에서 출생, 초기에는 연극의 막간 가수로 활약하였다.

1930년대초 《시에론》레코드에 《무궁화강산》(후에 《삼천리강산 에라 좋구나》로 곡명을 고쳤음.), 《뻐꾸기》, 《천리몽》 등을 취입하였다.

그후 《리갈》레코드에 《월야의 탄식》, 《꽃이 피면》, 《눈물을 흘리며》, 《공허에 지친 몸》, 《순정》 등을 취입하였다. 악극단의 배우로도 활약한바가 있다. 사망년대는 알수 없다.

 

가수 박향림(본명 박억별)

 

(1921-1946)

예명 박정림

1921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출생하여 원산에서 성장, 학력은 원산고녀를 중퇴.

1937년경에 박정림이란 예명으로 《태평》레코드에 《청춘극장》을 취입하여 가수가 되였다.

처음에는 《오케》레코드회사의 가수가 될것을 지망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야심을 품고 《태평》레코드에 《청춘극장》을 취입하였는데 이 노래로 하여 가수로 인정받게 되였다. 이어 《연지찍고 곤지찍고》, 《고향의 록야》를 취입하고 《콜럼비아》레코드회사로 전속을 옮기고 《그늘에 우는 천사》, 《전화일기》, 《부서진 정이나마》, 《사랑주고 병 샀소》, 《애련송》, 《타국의 려인숙》, 《항구에서 항구에로》, 《이국의 등불》, 《오빠는 풍각쟁이》, 《고향우편》 등을 취입하였다. 그리고 다시 《태평》레코드회사로 돌아와 《울고 넘는 무산령》, 《막간아가씨》 등을 취입하였다.

1939년경에는 《오케》레코드로 전속을 옮기고 《막간아가씨》와 함께 대표곡에 속하는 《코스모스탄식》을 취입하 였다.

이밖에도 《쓸쓸한 려관방》, 《요즘 차집은》, 《비에 젖은 화륜선》, 《해저문 황포강》 등 많은 노래들을 음판에 남기였다.

 

가수 최남용

 

(1910-1967)

개성시에서 출생하여 송도고보를 졸업.

1932년경에 《빅타》레코드에 《마음의 거문고》, 《갈대꽃》을 취입한 후에 리애리수와 함께 《상사타령》을 취입하였다.

1935년경에는 《가세 삼상봉》, 《사공의 노래》, 《산으로 바다로》, 《실버들》을 비롯한 많은 노래를 취입한 후에 《태평》레코드회사로 전속을 옮기고 《가여운 하루밤》, 《청춘시대》, 《박타령》, 《들꽃타령》, 《버들잎 하나》, 《아주까리등불》, 《비오는 선창》 등을 취입하였다.

 

배우 석금성(본명 석정의)

 

(1907-1995)

평안남도 룡강군 (지금의 증산군)에서 출생.

1920년대후반기부터 연극단체인 《토월회》, 《취성좌》, 《연극사》의 배우로 활동하면서 연극의 주제가들을 육성으로 불렀다.

1930년경 김안서 작사, 전기현 작곡인 《옛 생각》을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하였다.

그후 무성영화 《젊은이들의 노래》의 주제가 《젊은이들의 노래》를 《리갈》레코드에 취입하였다.

그는 연극배우로 1929년에 최승일 작 《고향을 떠나는 사람》에서 녀주인공역으로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외에 그가 출연한 연극들은 《시들은 방초》, 라운규 작, 라운규 연출인 《망향가》, 림선규 작, 문수일 연출인 《페허우에 우는 충혼》, 김소랑 작, 김소랑 연출들인 《사주팔자》, 《남편의 결심》 등을 비롯하여 《개화전야》, 《동학당》, 《급수부》, 《눈오는 밤》, 《바람부는 계절》, 《심청전》,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한낮에 꿈을 꾸는 사람들》, 《아리랑고개》, 《동백꽃아가씨》, 《약혼》, 《종소리》 등 많은 연극들에 출연하였다.

석금성은 《샘물터에서》, 《그네 뛰는 처녀》, 《우리가 제일일세》, 《조선의 행운》의 가사를 쓴 작가 최로사의 어머니이다.

8.15광복후 일제를 대신한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여 또다시 식민지암흑기가 도래하자 석금성은 애국애민의 정치를 펴나가시는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우리 민족을 희망찬 미래에로 령도해나가시는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찾아 입북할것을 결심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시아버지가 뇌출혈을 만나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홀로 병석에 남겨두고 떠날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는수없이 아들딸들을 먼저 북으로 떠나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북으로 가는 사람들을 따라 입북하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자신이 병석에 누워있는 몸이라 떠날수가 없었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북으로 떠나간 아들딸들의 생사여부를 알길이 없었던 석금성은 사찰들을 찾아가 북으로 간 아들딸들이 무사하기를 빌고빌었다.

그러던 1990년대초에 일본에 있는 친척을 찾아 도꾜로 갔는데 뜻밖에도 북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  화보와 달력들을 통하여 딸 최로사가 어버이수령 김일성대원수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보살피심속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되였다는것과 아들은 무용창작가로 보람있는 삶을 누리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렇게 일본땅에 와서 뜻밖에도 딸과 아들의 소식을 알게 된 석금성은 어버이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의   초상화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러 큰절을 올리면서 아들딸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작가, 예술인으로 키워주신데 대하여 거듭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후 서울로 돌아온 석금성은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하루빨리 조국이 통일되여 아들딸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고빌다가 1995년 9월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가수 미쓰꼬레아(모란봉)

 

본명은 알수가 없고 1917년경에 평양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권번이 운영하는 가무학교를 다니고 레코드취입에 나섰다고 한다.

그가 처녀시절에는 미쓰꼬레아로 이름으로, 시집을 간 후에는 모란봉이란 이름으로 음판에 취입하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으로 《콜럼비아》레코드에 《마의태자》, 《오, 내 사랑》, 《금수강산 좋을시고》, 《금수강산》 등을 취입하였다고 한다.

※ 그가 취입한 《마의태자》는 리은상 작사, 안기영 작곡의 《마의태자》가 아니다.

그후 1939년경에 《태평》레코드회사로 전속을 옮기고 박영호(김다인) 작사, 전기현 작곡인 《대동강 물결우에》, 박영호(김다인) 작사, 문일준 작곡인 《달같은 님아》, 박영호(처녀림) 작사, 전기현 작곡인 《은어알처녀》, 박영호 작사, 김교성 작곡인 《포곡새천지》 등을 취입하였다.

그후 모란봉이란 이름을 달고 《대동강 물결우에》를 재취입하였으며 민요조의 노래인 박영호 작사, 전기현 작곡 《백두산을 바라보고》를 취입하였다.

《백두산을 바라보고》는 광복후 《평북녕변가》로 곡명과 가사와 일부 선률들이 다듬어졌다.

그는 《백두산을 바라보고》와 함께 농촌의 세태적인 식생활을 반영한 《춘하추동 범벅》을 취입하여 이 노래가 오늘에 와서는 전래의 민요처럼 되여버렸다.

이밖에도 《처녀의 합창》, 《궁초댕기》, 《미나리 이십세》, 《통타령》, 《곤로봉 바라보고》, 《황진이의 노래》, 《물방아푸념》 등 많은 노래들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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