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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진평왕

[ 眞平王 ]

요약 신라의 제26대 왕(재위 579∼632).
출생-사망 579 ~ 632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579년 ~ 632년
본명 휘 백정(伯淨:白淨)
별칭 백정왕
활동분야 정치

성은 김(金)이고 이름[諱]은 백정(白淨)이다. 시호는 진평(眞平)이며, 건복(建福, 584~633)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을 따서 ‘백정왕(白淨王)’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맏아들인 동륜(銅輪, ?~572)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입종 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이자 진흥왕의 누이인 만호부인(萬呼夫人) 김씨이다. 왕비는 복승 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어머니를 만녕부인(萬寧夫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되어 있으며, 승만부인(僧滿夫人) 손씨(孫氏)를 후비(後妃)로 삼았다고도 나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眞平王)은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범상치 않았고 체격이 컸으며 지혜롭고 의지가 굳고 밝고 활달했다. 그리고 사냥을 무척 좋아해서 병부령(兵部令) 김후직(金后稷)의 간언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죽은 뒤 무덤 속에서도 간언을 하는 김후직의 충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키가 11자나 되었으며, 천주사(天柱寺)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밟은 돌계단이 한꺼번에 3개나 부러지기도 했다고 나온다.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은 566년(진흥왕 27)에 진흥왕의 태자(太子)가 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572년(진흥왕 33)에 죽었다. 576년(진흥왕 37) 진흥왕이 죽은 뒤에는 숙부인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이 왕위에 올랐으나, 579년(진지왕 4)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은 뒤에는 진지왕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진평왕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정란(政亂)과 황음(荒淫)을 이유로 나라 사람들이 진지왕을 폐위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진지왕에서 진평왕으로의 왕위 교체과정에 왕실 내부의 갈등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왕위에 오른 진평왕은 행정조직을 정비해 왕권을 강화했다. 579년(진평왕 원년)에는 이찬(伊湌)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친동생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을 각각 진정 갈문왕(眞正葛文王)과 진안 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했다. 580년(진평왕 2)에는 이찬 김후직을 병부령으로 임명했고, 581년(진평왕 3)에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했다. 583년(진평왕 5)에는 선박의 사무를 관장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했고, 584년(진평왕 6)에는 조세와 부역을 관장하는 조부(調府)와 궁중의 탈것과 행렬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했다. 586년(진평왕 8)에는 의례를 관장하는 예부령(禮部令) 2인을 두었으며, 588년(진평왕 10)에는 노리부가 죽자 이찬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589년(진평왕 11)에는 집사부(執事部)의 전신인 품주(稟主)에 대사(大舍) 2인을 두었고, 591년(진평왕 13)에는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왜전(倭典)에 령(令) 2인을 두었다. 621년(진평왕 43)에는 왜전의 명칭을 영객전(領客典)으로 바꾸었고, 622년(진평왕 44)에는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김용춘(金龍春)을 내성(內省) 사신(私臣)으로 삼아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을 모두 관리하게 했다. 623년(진평왕 45)에는 병부(兵部)에 대감(大監) 2인을 두었고, 624년(진평왕 45)에는 왕궁 호위를 담당하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명, 관리들의 포상을 관장하는 상사서(賞賜署)와 사찰을 관리하는 대도서(大道署)에 대정(大正) 1인씩을 두었다.

진평왕은 직속부대를 창설해 왕권의 군사적 기반도 강화하려고 했다. 583년(진평왕 5)에 서당(誓幢)을 설치했고, 625년(진평왕 47)에는 낭당(郞幢)을 설치했다. 서당과 낭당은 뒷날 9서당(九誓幢)의 녹금서당(綠衿誓幢)과 자금서당(紫衿誓幢)으로 발전했다. 이 밖에 591년(진평왕 13)에는 사천당(四千幢), 604년(진평왕 26)에는 군사당(軍師幢), 605년(진평왕 27)에는 급당(急幢) 등의 군사조직도 새로 만들었다.

신라는 진흥왕 때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으나 진평왕 때에 이르러 이를 되찾으려는 백제·고구려와 자주 충돌했다. 602년(진평왕 24) 백제의 무왕(武王, 재위 600~641)이 모산성(母山城)이라 불리는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해오자 진평왕은 수천 명의 기병을 보내 이를 물리쳤다. 진평왕은 소타(小陁)·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에 4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변경을 공략했고, 이를 공격해온 백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603년(진평왕 25)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해오자 진평왕이 직접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해 이를 물리쳤다. 그리고 이듬해 남천주(南川州)를 폐지하고 다시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다. 그러나 608년(진평왕 30)에는 고구려에게 우명산성(牛鳴山城)을, 611년(진평왕 33)에는 백제에게 가잠성(椵岑城)을 빼앗겼다. 백제는 616년(진평왕 38) 다시 아막성을 공격해오기도 했다. 618년(진평왕 40) 진평왕은 북한산주의 군주(軍主)인 변품(邊品)을 앞세워 가잠성을 공격해 이를 탈환했다. 그러자 백제는 623년(진평왕 45)에 신라의 늑노현(勒弩縣)을 기습했고, 624년(진평왕 46)에도 신라의 속함(速含)·앵잠(櫻岑)·기잠(歧岑)·봉잠(烽岑)·기현(旗縣)·혈책(穴柵) 등 6개의 성을 공격해 3개의 성을 점령했다. 626년(진평왕 48)에는 성주 동소(東所)를 죽이고 주재성(主在城)을 장악했다. 627년(진평왕 49)에는 사걸(沙乞)이 이끄는 백제군이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점령하고 3백여 명의 신라 백성을 붙잡아가기도 했다. 당시 백제 무왕은 웅진(雄鎭)으로 병력을 모아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으나, 진평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하자 공격을 중단했다. 628년(진평왕 50) 백제가 다시 가잠성을 포위하고 공격해왔으나 진평왕은 군대를 보내 이를 물리쳤으며, 629년(진평왕 51)에는 김용춘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처럼 백제·고구려와의 분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진평왕은 591년(진평왕 13) 남산성(南山城)을 쌓고, 593년(진평왕 15)에는 명활성(明活城)과 서형산성(西兄山城) 고쳐 쌓는 등 국방 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중국의 수(隋, 581~618)·당(唐, 618~907)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해 고립을 피하고 고구려를 압박하려 했다. 594년(진평왕 16) 수나라는 진평왕을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보내왔고, 신라는 596년(진평왕 18)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600년(진평왕 22)에도 신라는 나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大舍) 횡천(橫川)을 사신으로 수나라로 보냈고, 602년(진평왕 24)과 604년(진평왕 26)에도 대나마(大奈麻) 상군(上軍)과 만세(萬世), 혜문(惠文)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 608년(진평왕 30)에는 승려인 원광(圓光)을 시켜 수나라에 고구려를 치도록 요청하는 글을 짓게 했고, 611년(진평왕 33)에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전했다. 이는 612년 수나라 양제(煬帝, 재위 604~617)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진평왕은 621년(진평왕 43), 623년(진평왕 45), 625년(진평왕 47), 626년(진평왕 48), 627년(진평왕 49), 629년(진평왕 51), 631년(진평왕 53) 등 거의 해마다 사신을 보냈다. 당나라도 621년 유문소(庾文素)를 사신으로 신라로 보내왔고, 624년(진평왕 46)에는 진평왕을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봉한다는 당나라 고조(高祖, 재위 618~626)의 조서를 보내오기도 했다. 진평왕은 625년에도 고구려가 당나라로의 통행로를 막고 있으며 자주 침범한다고 알리는 등 당나라를 이용해 고구려를 압박하려고 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진평왕 때 신라는 불법(佛法)을 배우러 중국에 다녀온 유학승들이 늘어났고, 이들의 활동으로 불교가 더욱 융성해졌다. 585년(진평왕 7년)에는 지명(智明)이, 589년(진평왕 11)에는 원광(圓光)이 불법을 연구하기 위해 남진(南陳, 557~589)으로 건너갔다. 원광은 600년(진평왕 22)에 귀국했으며, 지명은 602년(진평왕 24)에 귀국했다. 진평왕은 지명을 대덕(大德)으로 삼았고, 원광은 중요한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기며 중용했다. 담육(曇育)은 596년(진평왕 18)에 수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605년(진평왕 27)에 귀국했다. 613년(진평왕 35)에는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진평왕 때 담수(淡水)가 ‘날현인(捺絃引)’이라는 악곡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삼국유사》에는 584년(진평왕 6)에 황룡사의 금당(金堂)이 완성되었다고 나온다.

진평왕은 54년 동안이나 신라의 왕위에 있었는데, 죽기 직전인 631년(진평왕 53) 여름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阿湌) 석품(石品)이 모반 혐의로 처형했다. 진평왕은 632년(진평왕 54) 정월에 죽었으며 한지(漢只)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한 진평왕릉은 사적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맏딸인 덕만(德曼)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신라 최초의 여왕인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다. 그리고 또 다른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김용춘(金龍春)과 결혼해 제29대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을 낳았다.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제30대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꾀를 써서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당시의 신라와 백제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이밖에도 진평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融天師彗星歌眞平王代)’ 조에는 융천사가 〈혜성가〉를 지어 부르자 하늘의 변괴가 없어지고 왜병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도화녀 비형랑(桃花女鼻荊郞)’ 조에는 죽은 진지왕이 도화(桃花)라는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인 비형(鼻荊)에게 귀신을 부리는 재주가 있어, 진평왕이 그를 궁에서 키워 집사(執事)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천사옥대(天賜玉帶)’, ‘원광서학(圓光西學)’, ‘이혜동진(二惠同塵)’ 등의 이야기도 모두 진평왕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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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릉 경북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 제 26대 진평왕의 릉. 출처: do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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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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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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