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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화 또는 마호정

 

영화 < 패왕별희 >는 중국의 경극에서 여자 역할을 맡은 것이 사실은 남자였음을 알려준다. 일본의 가부끼에서도 여자 연기를 한 것은 남자였고, 이런 전통은 신파극에서까지도 지속된다. 데이빗 보드웰의 《 세계영화사 》에 의하면, 인도의 영화 < 하리샨드라 왕 >에서 여왕과 시녀들을 연기한 것은 소년들이었는데 그것은 인도의 연극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물론 서양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 파리넬리 >는 소프라노를 맡았던 사람이 남자였음을 보여주고,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는 연극 무대에서 여자 역을 한 사람이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여자 역할을 남자가 맡은 것은, 적어도 공연 예술에서,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조선에서 활동 사진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여장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은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한국 최초의 활동사진(영화라기보다 움직이는 그림)은 1919년에 제작된 연쇄극 < 의리적 구토 >인데, 이 작품에서 김영덕 이라는 남자 배우가 여자 역을 맡았다. 다른 연쇄극 < 지기 > 에서는 이응수 가 여자 역을 맡았다. 호현찬에 의하면, 이들 외에도 당시 여자 역을 맡았던 사람들로 고수철, 최여환 등이 있었다고 한다.

 

연쇄극은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이때 스크린에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20년에 만들어진 < 호열자 >와 < 장한몽 >에 마호정(馬豪政) 이라는 여자 배우가 출연을 하기는 했다. 마호정 은 당시의 봉건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여걸이었다고 한다. 구황실 나인[內人] 출신인 그녀는 사재를 털어 ‘취성좌’ 라는 극단을 운영했는데, 그 당시 나이가 이미 사십대였다. 안종화 는 그녀를 ‘여배우의 원조’ 라 칭하며, 그녀가 무대에서 맡은 역은 주로 상류가정의 소실이거나 계모 등의 악역이어서 그 능란한 연기 때문에 관객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월화(李月華) 가 1923년에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일컬어지는 < 월하의 맹서 >에 처음 등장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이 열광적이었다는 기록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그녀는 나이도 젊은데다 악역이 아닌 착한 여주인공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여자 영화 배우에 대한 질문에 ‘ 이월화 또는 마호정 ’이라는 애매한 답을 한 건 어째서일까?

 

호현찬의 《한국영화 100년》 33쪽에는 모순되는 두 부분이 발견되기도 한다. 분명 “1923년 윤백남의 < 월하의 맹서 >에 이월화 라는 한국영화 최초의 여배우가 등장한다”라고 적혀 있는데, 그로부터 몇 줄 아래에는 “당시 영화에 처음 출연한 여배우는 40대의 마호정 뿐이었는데……”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최초의 여배우에 대한 한국영화사가들의 입장은 실제로 둘로 나뉜다. 김수남과 김갑의는 마호정 을 지목하는 반면, 유현목과 정종화는 이월화 를 지목한다.

 

아마도 이러한 입장의 혼란, 혹은 입장의 차이는 연쇄극의 형식을 영화로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마호정이 출연한 두 작품은 모두 연쇄극이었지만, 이월화 가 출연한 첫 작품은 연쇄극을 제외했을 때 한국 최초의 영화로 언급되곤 하는 < 월하의 맹서 >였다. 김갑의는 “연쇄활동사진극이라는 형식의 < 의리적 구토 >가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라면, 마호정 역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연극 배우이자 영화배우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문제 제기를 했다. 그러나 그의 문제 제기를 뒤집어 해석하자면, 연쇄극인 <의리적 구토>를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마호정 역시 최초의 여자 영화 배우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사실 최초의 여자 영화 배우가 이월화 마호정 이냐를 따지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하다. 그런 것을 따지기에 앞서 그런 여자 배우들이 당시의 작품들에 출연을 했었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열렬한 반응도 얻었다는 것들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보다 명확한 것은 당대 최초의 여자 스타가 이월화 였다는 사실일 것인데, 이 최초의 여자 스타의 인생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조희문에 의하면, 그녀는 충남 예산 출신이다. 그러나 부모, 출생일, 본명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고아였다고 한다. ‘이정숙’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었는데 그것이 본명인지는 불확실하고, ‘홍소회’가 본명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그녀를 영화계로 발탁한 것은
윤백남 이었는데, 영화계를 떠나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역시 윤백남이었다. 윤백남이 1924년 < 운영전 >이라는 작품을 만들 때 이월화 는 주연을 맡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윤백남은 자신과 염문설이 떠돌던 ‘ 김우연 ’이라는 신인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도도하고 자존심도 강했던 이월화 가 이 결정에 실망하여 영화사를 떠난 것이다.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난무한다. 정종화는 조선 권번의 기생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간 후 음독 자살했다고 하고, 유현목은 한때 댄서로 전락하여 극계와 영화계를 떠나 상해에서 살다가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했던 중 일본에서 심장마비로 1934년 7월 8일 저녁에 객사했다고 하고, 호현찬은 뭇사나이들과 관계를 맺고 이모씨와 결혼도 하고 상해에서 도피 생활을 하다가 다시 연극무대로 컴백하는 등 참으로 복잡다단한 삶을 살다가 마침내 권번 기생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무맹랑한 추측인지 알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부분들을 정리하면, 잠시 상해에서 살기도 하고 귀국 후에 연극계에 복귀하기도 하다가 가난함으로 인해 기생이 된 후 일본에 가게 된 것 같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음독 자살이라느니, 심장마비라느니,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느니 하는 다양한 주장들이 엇갈리지만, 아무튼 그녀가 젊은 나이에 이국 땅에서 고단한 인생을 마감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숱한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여자 스타의 인생치고는 너무 씁쓸하고 비참하다.

 

  <글 : 장우진 woojin71@hanmail.net >     

 

※ 참고한 글들
  유현목, 《韓國映畵發達史》, 한진출판사, 1986.
  호현찬, 《한국영화 100년》, 문학사상사, 2000.
  정종화, 《자료로 본 한국영화사1》, 열화당, 1997.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김갑의, 《世界映畵와 韓國映畵》, 집문당, 1999.
  김수남, 《한국 영화작가 연구》, 예니, 1995.

 

200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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