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자료

일본군부는 위안부 모집에 전면에 나서지 않고, 위안소 민간인 경영자를 앞세워 그들을 이용하였으며(위안소 경영자와 일본군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에 계속), 관련자료를 전후 모두 소각했거나, 현재까지도 그 자료를 전면 공개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위안부 강제연행을 명령한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다른 자료를 참고해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있어서의 강제연행 사실을 증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에서의 위안부 모집에 대한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자료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치하에 있었다는 그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증언 이외의 자료는 전혀 없다다시피 하다. 헌병 경찰제도가 시행되던 한반도에서 헌병이나 경찰의 행위는 바로 국가의 행위였기에, 이에 반항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각종 증언에도 이 사실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또는 공출, 근로대라는 명목으로 간호사나 일본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다, 뒤에 위안부가 된 사례가 상당수에 이르고 있으며, 피해자 자신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이들이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성 노리개가 될 것이라 상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한반도에서의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반면, 인도네시아, 중국에서는 이에 관한 몇 가지 자료가 존재한다. 위안부로 강제연행했다는 증거자료 중 가장 중요한 자료가 스즈키 중장의 자필진술서, 네덜란드 바티비야법정 전범재판 판결문, 인도네시아 모어섬의 심문조서 등이 존재한다.

네덜란드인 위안부 강제연행 사건

스즈키 히라쿠 중장의 자필진술서

호주군 간호부에 대한 위안강요 미수사건

극동 군사재판의 관계 문서 중 인도네시아 모어섬에서의 일본 육군중위에 대한 심문조서


네덜란드인 위안부 강제연행 사건(일명 백마사건)

일본 남방군 담당의 제16군 간부 후보생대가 17세 이상의 네덜란드인 여성을 스마란 위안소에 연행하여 적어도 35명 이상에게 매춘을 강제한 사건이다. 1992년 아사히신문사의 조사로 자바섬 스마란에서 네덜란드인 여성을 강제연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바타비야법정 전범재판 판결문

이 판결문에는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 일본 국내에서 행한 수사기록, 피고나 가족들의 감형탄원서, ‘일본해군 점령기간에 보르네오 서부에서 있었던 강제매춘에 관한 보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1944년 2월25일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여성 가운데 18살에서 26살까지는 모두 수용소 사무소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 장교가 이들에게 가족구성 등에 관해 질문을 했다.

다음달 그들 중에서 뽑힌 여러 명의 여성은 스마란으로 연행돼 호텔방에 분산수용됐다. 방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 구타를 당했다. 두 명의 소녀는 도망가려 했으나 살해됐고 한 명의 소녀는 키니네를 먹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기소이유의 개요(바타비야 임시군법회의재판 명세표에 의함(차소노 요시오<茶園義男>편 B,C급 전범 네덜란드 재판자료 전권통람)

"1944년 3월 스마란 주둔지 사령관A(겸 남방군 간부 후보생대 대장)가 <제16>군 사령부와의 묵계로 스마란 억류소에 수용되고 있는 약 1백 명의 네덜란드 여성을 풀어서 이를 시내 4개소에 분배하여 위안소를 개설했다."고 돼 있다. "개설에는 주로 남방군 간부후보생대의 B소좌가 참여했고 상사의 경고에 따라서 1,2개월 후에 폐쇄했다"라고도 돼 있다. 또 A대장의 재판은 따로 실행됐는데 그 '기소이유 개요'에는 "스마란의 각 수용소 및 안베라와의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약 35명의 여성을 위안소에 숙박시켜 매음을 강제하며 강간을 하고 또 부당하게 취급한 책임"이라고 돼 있다.

스마란 위안소의 경우 외에 다른 1건은 죤벨 헌병분대사건으로 '기소이유 개요'에 의하면 동 분대의 C헌병 대위는 네덜란드 국적의 여성을 '강제로 위안소에 감금하여 매음시켰다'라고 한다.

 아사히 신문 1992년 8월 30일자 기사에 의하면,

이 2사건에 관해서 네덜란드 국립공문서관 장서의 재판자료에 의하면, 실제로 2월에 연행된 여성은 35명, 3월에 개설된 위안소는 장교클럽 스마란 클럽, 히노마루 클럽, 청운장의 4개로 경영자의 신분은 군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연행은 뒤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지원 형식의 문서를 받고 있었지만, 적게 봐서 25명에 관해서는 "기만, 폭력, 협박을 사용함으로써 억류소에서 부인이나 소녀들을 연행했다.'라고 결론져졌다. 판결은 1948년에 나왔으며 부녀자를 강제매춘에 연행한 죄, 매춘강제죄, 강간죄, 억류자를 부당하게 취급한 죄 중의 하나 또는 복합으로 적용되어 상기한 B소자가 사형, 부관 1명과 남방군 예비 사관학교 소속의 4명(중 2명은 군의)이 징역 2년에서 16년, 위안소 경영자 4명이 징역 7년에서 20년, 사정관과 조장 각 1명이 무죄로 되었다. 또 다음해에 A는 징역 12년의 판결을 받았다.

(자료출처;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의 종군위안부 자료집, 아사히 신문 1992년 7월 21일자 기사)


다음은 바타비야 법정 재판에서 밝혀진 피고들의 범죄내용이다.
(내용출처;
半月城通信 No.36 일본어 번역은 본인이 직접한 것으로 전문가 번역은 아님.)

피고 1. 45세, 1902년 히로시마현 태생, 육군 대령
1945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스마란의 병참장교의 직무에 있던 피고는 전쟁 범죄가 범해지고 있거나, 혹은 전쟁 범죄가 범해질 것으로 미루어 명백히 알고 있었는지, 당연히 의심해 보아야 했음에도,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민간인 및 군인이 35명 정도의 여성에게 매춘을 강제하여 강간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 여성들은 일본군 점령 당국에 의해서, 스마란 시내의 스마란東, 헤단岸, 하르마헤라 3곳의 여성 수용소, 또, 안베라와 제4, 제5로 칭하는 2곳의 여성 수용소로부터 연행되어 , 장교클럽 스마란 클럽, 히노마루 클럽, 청운장등의 스마란 시내의 몇 채의 위안소에 수용되고 있던 여성들이다.

피고 3. 38세, 1910년 히로시마현 태생, 육군 소좌

(a) 피고는 1944년 2월 26일경, 동년 동월의 어느 날, 스마란 시내 카나리란에 있는 건물에 놓아두고 35명 정도의 여성들을, 위안소로서 설비한 4곳의 건물에 수송할 것을 명령했다. ··略··또 피고는, 병참장교 대리의 직무에 있고, 앞에서 본 여성들 가운데, 자유의지로 매춘을 행한 여성은 전혀 없거나, 있었다 해도 극히 소수이며, 매춘을 시키기 위해 실력 행사가 가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 혹은, 당연히 혐의를 가져야 할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여성들에게 매춘부로 일할 것을 명하였다.

(b)··略··'장교 클럽'이라 불리는 건물에 대해··略··불특정 다수의 일본병 과의 자발적인 성교를 계속 거부한다면, 그녀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죽여버리거나 가족에게 보복조처를 취하겠다고 협박해 매춘을 강제하였다.

피고 9. 41세, 1907년 10월 9일 도쿄 태생, 육군 상사

···당시 , '스마란클럽'으로 불린 위안소 지배인을 하고 있었을 무렵, 피고는 일본군 점령 당국의 강제 수용소로부터 연행된 소녀나 여성 7명 정도에게, 매춘을 강제하여 여성들이 일본장병과의 혼외 성교를 거절하면 구타하는 등의 폭력을 행사하였다.

피고 12. 39세, 1909년 1월 24일 야마나시현 태생, 육군 상사

···장교 클럽으로 불리는 위안소의 지배인이었을 때,···혼외성교를 거부하면, 더 나쁜 상황하에 있는 병사용 위안소로 보내겠다고 위협하여, 강간,강제 연행, 강제 매춘 또 그 외 일반적인 학대로 여성들 모두, 혹은 많은 소녀에게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카와다 후미코(川田文子) '인도네시아의 『위안부』'明石書店]


스마란 위안소는 1944년 2월 신설되었는데, 제16군 간부 호보생대는 17세 이상의 네덜란드 여성을 스마란 위안소에 강제 연행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억류인이 필사적으로 이에 대항하여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포로 조사차 방문한 오다지마 카오루 대령의 귀에 들어갔고, 일본군 중앙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모른 척 덮어 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국제여론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2개월 후 이 위안소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일본군위안부로 강제 연행된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은 일례이다. 재판에서 일본군 피고의 일부는 네덜란드 여성에게 “매춘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얘기하지 않고 웨이트리스로 일하게 된다고만 말했다”라고 밝혀 이들을 속여서 연행한 사실을 인정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네덜란드인 위안부에 대해서는 네덜란드 정부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그 총수가 200~3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얀 러프 루헨 할머니의 증언

얼마 전, 푸른 눈의 네덜란드인 일본군위안부 "얀"할머니의 증언이 소개되어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얀 할머니는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던 시기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9살 때인 1942년 3월 일본이 자바섬으로 진격해 들어와, 다른 네덜란드인들과 함께 강제 수용을 당했다. 얀 할머니는 수용소 생활을 2년을 한 뒤 1944년 일본군에 의해 '위안소'에 끌려가 3개월간에 걸쳐 성폭행당했다. 1994년 위안부의 경험을 책과 다큐멘터리로 펴냈으며, 지난 2000년과 2001년 방송에서도 증언하였다.

호주 한국신문(The Sydney Korean Herald)28th Jul~3rd Aug.2006의 기사내용은 이곳을 클릭

2001년 방송된 호주 ABC TV의 방송내용은 이곳을 클릭


스즈키 히라쿠(鈴木啓久)중장의 자필진술서

(이에 관한 자료는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 공동대표의 글중 스즈키 중장의 자필진술서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다. 
원문은
이곳을 클릭) 

필공자술(筆供自述)

요즈음, 1956년에 중국에서 행해진 일본인 전범 재판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45인의 공술서(필공자술)의 일부가 아라이 토시오(新井利男)씨에 의해 공표되었다. 몇 년 전에 나는 무순 전범 관리소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정연하게 되어있는 지하 소굴이나 전범 재판의 귀중한 필름을 보면서, 당시 중국 측의 대응은 일본 군인을 인간으로서 대우하는 것이어서 공술서는 절대 억압이나 강제에 의해 억지로 작성된 것이 아니었다는 중국 귀환자 연합회(중귀련)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기하였다.

실제, 이러한 공술서에 대해 '이것은 형을 가볍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써 쓴 것이므로 신빙성이 없다' '그들은 세뇌되었다.' 등과 같은 중상모략이 있지만, 중귀련 사람들이 전후, 한결같이 변함없는 의사로 증언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진술의 진가를 증명하고 있다.

역사학자 후지와라 아키라씨는 이 공술서의 자료 가치에 대해서,

1. 진술의 내용은 극히 구체적이고 정확하며, 이것은 타국의 BC급 전범 재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그 내용이 지극히 상세하고 정확하다는 것은 현재 밝혀지고 있는 전투 상세보도나 전시 월보 등의 일본군의 다른 사료와 조합해 봐도 분명하다,

2. 이러한 진술은 단순히 개개의 사건에 대해가 아니고, 중국 전선에 있어서의 일본군의 전쟁 범죄의 전체상을 떠오르게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들은 고급 간부 자신에 의해서 자백 되고 있어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 책임 문제에서도 극히 유력한 사료이다.

3. 이 공술서를 쓴 것이 진짜 육군 군인이며 장군들이어서, 적지않은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등의 이유를 들어 이 사료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세계」1998년5월호를 참조)

이번, 공표된 45명은 타이유완 전범 관리소와 무순전범 관리소에 구류되고 있던 일본 군인이며, 8년에서 20년까지의 유기형을 받은 사람들이다. 1950년7월에, 969명의 전범 용의자가 소련에서 중국으로 인도되었다. 이미 중국에서 체포되었던 140명과 함께 무순과 타이유완의 전범 관리소에 수용된 그들은 '인죄학습'을 계속해 공술서를 작성했다. 대부분은 기소 유예가 된 가운데, 45명만이 기소되었다. 이번 공표된 것은 그 당시 기소된 군인의 것이다.

45명 중 30명은 만기 전에 석방되었고 1명은 병 치료를 위해 56년7월에 석방되었다. 이 안에, 육군 117사단장(중장)인 스즈키 히라쿠(1890년 태어나 석방 후 82년에 사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지와라씨는 스즈키 진술에 대해서 '방위청의 전사(戰史)와 말씨에 차이는 있어도, 같은 내용을 진술하고 있다'라고 그 정확함을 평가하고 있다.

스즈키의 공술서는 중국인에 대한 잔인한 살해나 약탈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1944년 11월에 림현(林縣, 린시엔)과 준현(濬縣, 쥔시엔) 동방 지구의 팔로군을 공격하기 위해, 제87여단의 보병3대대와 제12군에 배속된 방역 급수반 1반과 기병1연대를 지휘해 림현 남부 지구를 공격하여, 철퇴(撤退)할 때 방역 급수반이 서너 곳의 마을에 콜레라균을 살포한 것도 기술되어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상덕(常德)작전, 영파(寧波)작전, 절강(浙江)작전 때에 세균이 사용된 것은 이미 조사·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 진술은 다른 작전에서도 세균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스즈키는 일본군이 실시한 것을 다방면에 걸쳐 상세하게 쓰고 있으며 그중에 '위안부'에 관한 기술도 있다.

1941년, 스즈키는 소장이 되어 화북의 제27사단의 보병 단장이 되었다. 소현(巢縣, 챠오시엔)에서 준남 철도 일부의 경비를 맡고 있었을 무렵, 스즈키는 양쯔강 북해안의 준남선 연선(沿線)에 있는 소현에서 부관에게 명해 위안소를 설치하여, 중국인과 조선인 여성 20명을 유괴해 '위안부'로 삼았다고 한다.

私ハ巣県二於テ慰安所ヲ設置スルコトヲ副官堀尾少佐ニ命令シテ之レヲ設置セシメ、中国人民及朝鮮人民帰女二〇名ヲ誘拐シテ慰安婦トナサシメマシタ

나는 소현으로 돌아와 위안소를 설치할 것을 부관 호리오 소좌에게 명령, 위안소를 설치하게 하여 중국인과 조선인 여성 20명을 유괴하여 위안부로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위안소 설치는 부관 담당이었다고 인식해 오고 있지만,  스즈키의 진술은 그 사실을 한층 더 뒷받침하는 것이다.

1942년, 스즈키는 제1연대로부터 일본군이 통과하는 마을에서 팔로군이 반격하는 곳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연대장에게 철저하게 소탕할 것을 명했다. 그곳에서는 굉장한 만행과 약탈이 있었지만 이때도 스즈키는 풍윤(豊潤, 펑룬)이나 사하(砂河, 사허)등에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이때에 중국인 여성 약 60명을 유괴하고 위안부로 만들었다고 한다.

日本侵略軍ノ蟠居スル所ニハ私ハ各所(豊潤、砂河鎮其他二、三)ニ慰安所ヲ設置スルコトヲ命令シ、中国人民婦女ヲ誘拐シテ慰安婦トナサシメタノデアリマス。其ノ婦女ノ数ハ約六〇名デアリマス

나는 일본 침략군이 주둔하는 곳,  각 장소(풍윤, 사하진 기타 2, 3곳)에 위안소 설치를 명령하여, 중국인 여성을 유괴해 위안부로 만들었다. 그 여성의 수는 약 60명이다

또한 1945년4월, 보병 중대가 맹현(猛県, 멍시엔)에서 팔로군을 공격하고 있었을 무렵, 스즈키는 위안소 설치를 다시 명령해, 중국인과 조선인 여성 약 60명을 유괴하여 '위안부'로 만들었다.

日本侵略軍ノ蟠居地ニハ、私ハ所謂慰安所ノ設置ヲ命ジ、中国並ニ朝鮮人民ノ婦女ヲ誘拐シテ所謂慰婦トナシタノデアリマシテ、其ノ数ハ約六〇名デアリマス

일본 침략군의 주둔지에, 나는 소위 위안소의 설치를 명해 중국인과 아울러 조선인 여성을 유괴하여 소위 위안부로 만들었다, 그 수는 약 60명이다

스즈키 히라쿠의 공술서에는 매우 상세하게 침략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위안소 설치에 대해 쓰인 것이 몹시 흥미롭다.

먼저 위안소의 설치는 군이 조직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밝혔다는 것이고,

둘째는 '위안부'의 징집에 관해 '유괴'라고 하는 강제 연행의 방법이 행해졌다는 것이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강간소

전(前) 군인 중에는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안소는 '강간소'라고 인식한 사람도 있었다. 무순 전범 관리소에 수용되어 있던 시기에 이처럼 진술하고 있는 일본군인이 있었던 것이다.

1941년9월 하순, 산둥성 력성현 서영(山東省歷城縣西營)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의 군조였던 A는, 공술서에서 위안소를 '강간소'라고 하여,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공술서에는 '위안부'를 확보해 위안소를 설치할 것을 촌장에게 강제한 사실과, 중국인과 조선인 여성 2명을 납치한 사실, '위안부'의 식사비 100엔을 주민이 지급하게 한 사실, 2명을 감금하여 대원 15명이 1개월간에 걸쳐서 여성을 강간한 사실, '위안부'에게 낮에는 세탁을 시키고 때로는 주연의 자리에 '위안부'를 데려가 능욕한 사실, 중국인 여성은 성병 때문에 1개월 후에 되돌려 보냈다는 일등이 기술되어 있다.

西営鎮長を呼び出して二名の婦人を拉致し強姦所を設置することを強制し、一〇月一日頃より一箇月間、済南緯八路より中国婦人一名、朝鮮婦人一名、何れも二十歳位を鎮長を通して西営に拉致させ、一ケ月一名一〇〇円食事は村民に支払はせ西営蟠居隊より二〇〇米位離れた中国人家屋に監禁し自由を拘束して中隊員一五名に強姦行為を行はしめ中国婦人は性病があるに拘らず強姦させ、昼間中隊で洗濯四回二時間位酒呑みに二回夜間連行して自由を束縛して酒つぎをさせ辱かしめ中国婦人は性病の侭一箇月後済南に追い帰しました

서영진장(長)을 불러 2명의 여성을 납치하여 강간소 설치를 강제하였고, 10월 1일경부터 1개월간, 제남 위팔로에서 양쪽 모두 20세인 중국여성 1명과 조선여성 1명을, 진장(촌장)을 통해 서영에 납치하게 하여, 1개월간 1인당 100엔의 식사는 주민에게 지급하게 하였으며, 서영 주둔부대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중국인 가옥에 감금, 자유를 구속하여 중대원 15명이 강간행위를 하였고, 중국 여성은 성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간시켜, 낮에는 중대에서 세탁 4회 2시간 정도, 주연에 2회 야간 연행하여 자유를 속박하여 술자리 다음을 강제해 능욕하였고, 중국여성은 성병으로 1개월 후 제남에 되돌려 보냈다.



호주군 간호부에 대한 위안강요미수사건

일본군에 포로가 된 호주군 소속 간호부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가 될 것을 강요당한 사건(미수)으로 맬버른대학의 다나카 토시유키(田中利幸)씨가 발견한 자료이다.

64명의 호주군 간호부 등을 태운 배가 싱가포르 함락 직전에 출항했는데, 수마트라섬 동쪽의 반카섬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비행기로 격침되어 간호부 52명이 반카섬에 겨우 도착했다. 그러나 그 바닷가에서 간호부들의 대부분은 일본군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한다. 겨우 살아남은 간호부는 반카섬 수용소에 수용된 후 수마트라섬의 파렌반 근교의 수용소로 이송됐다.

그 2주일 후 장교클럽과 6개소의 위안소로 추정되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간호부가 장교클럽에 호출되어 전원이 갔지만 대부분은 돌려보내 지고 4명이 남았다. 다음날에도 4명이 연행되어 어느 간호부는 위안을 위해서 여성이 필요하다고 쓰인 문서를 보았다고 한다. 그녀들은 위안부냐 굶어 죽느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는데, 그녀들은 완강하게 이를 거절했으며, 수용소를 관할하는 파렌반주 장관(일본인)에게 통보되었기에 중지되었다.

아래 자료는 반카섬 호주 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것으로, '로이드준장이 재 멜보룬 법무부 담당장관에게 보낸 극비친서(1945.9.28)'중 '2/10 호주종합병원의 간호원 B의 공술의 일부이다.

....우리들은 클럽 근처에 있는 다른 숙소로 옮겨졌다...略...
 이들 숙소는 우리들 추측으로는 일본인을 위한 소위 "위안소"였으며 그와 같은 사용이 가능한 상태로 돼 있었다. 당연한 일로서 우리는 불안한 나머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우리들이 클럽을 개설한 장교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럽이 개설되던 날 밤의 일인데 우리는 거기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가기로 결정했다. 우리 중의 2,3명은 앓고 있었는데 그 이외의 사람은 모두 나가서 일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들은 단지 7,8명의 여자만을 소망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잠시 거기에 있으니까 그들은 4명의 간호원 만이 남아있으면 된다고 했다. 클럽에 나와서 일본인의 요구에 응하지 않게 되면 굶어 죽게 되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는 얘기가 들어왔었는데 그때 우리는 이미 아사지경에 있었던 것이다.

뒤에 남은 4명의 간호원은 그날 밤은 일본인의 설득을 살짝 피해서 전원 무사히 귀사했다. 그 후 우리는 매우 의연한 태도로 두 번 다시 문제의 클럽에 출입할 의사가 없음을 딱 잘라 선언했다. 이튿날 오후 일본인 장교가 찾아와서 리스트에 올라있는 4명의 이름을 불러댔다.

나의 이름도 우연히 그 속에 포함돼 있었다. 우리는 클럽에 연행되어 3명의 일본인이 있는 방에 하나하나 끌려들어 갔다.

그들은 우리가 일본인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언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간호하는 일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그러나 그들의 말투에 따르면 그 이외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며 우리는 벌써 그들의 진의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여지는 없었다. 또 간호원의 한 사람은 면담 중에 영어의 문서가 눈에 띠었는데 그 머리 부분에는 일본군의 위안을 위해서 여자가 필요하다는 요지가 적혀 있었다.

그들은 만약 우리가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식료품울 제공할 생각이 없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굶어 죽게 된다고 우리 4명 중의 한 사람에게 선언한 다음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죽는 편이 났다고 분명히 잘라 말했다. 이튿날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전언을 어느 네덜란드인 의사를 통해서 겨우 파렌방 주장관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주장관은 이러한 사태에 관해서는 아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렇게 해서 이러한 사태에는 종지부를 찍었다.......

(자료출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의 종군위안부 자료집, 원문번역 金淳鎬,p438,439)


인도네시아 모어섬에서의 일본 육군중위에 대한 심문조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의 극동 군사재판의 관계 문서 중, 일본 군인의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심문조서가 발견되었는데, 그중에는. 지휘관이었던 육군 중위가 인도네시아 모어섬에서 현지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카와다 후미코씨가 이 문서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그 진술내용은 다음과 같다.

問 ; ある証人はあなたが婦女たちを強姦し、その婦人たちは兵営に連れて行か  れ、日本人たちの用に供せられたと言いましたが、それはほんとうですか?
문 ; 어느 증인이, 당신이 여성들을 강간하여 그 여성들을 병영에 데려가, 일본인들이 하는 일에 제공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정말입니까?
 

答 ; 私は兵隊たちのために娼家を一軒設け、私自身もこれを利用しました?
답 ; 저는 군인들을 위해 유곽을 한 채 마련하여, 저 또한 이곳을 이용했습니다.
 

問 ; 婦女たちはその娼家に行くことを快諾しましたか?
문 ;여성들이 그 유곽에 가는 일을 쾌히 받아들였습니까?
 

答 ; ある者は快諾し、ある者は快諾しませんでした。
답 ; 어떤 여성은 쾌히 허락했으며, 어떤 여성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問 ; 幾人女がそこにおりましたか。
문 ; 몇 명의 여성이 그곳에서 내렸습니까?
 

答 ; 六人です。
답 ; 여섯 명입니다.
 

問 ; その女たちのうち、幾人が娼家に入るように強いられましたか?
문 ; 그 여자들 중, 몇 사람이 유곽에 들어가도록 강요당했습니까?
 

答 ; 五人です。
답 ; 다섯 명입니다.
 

問 ; どうしてそれらの婦女たちは娼家に入るように強いられたのですか。
문 ; 어째서 그 여성들이 유곽에 들어가도록 강요당했습니까?
 

答 ; 彼らは憲兵隊を攻撃した者の娘たちでありました。
답 ; 그들은 헌병대를 공격한 사람의 딸들이었습니다.
 

問 ; ではその婦女たちは父親のしたことの罰として娼家に入るよう強いられた のですね。
문 ; 그럼, 그 여자들은 부친이 한 일에 대한 벌로써 유곽에 들어가도록 강요당했다는 것이군요.
 

答 ; 左様です。
답 ; 그렇습니다.

(자료출처; 半月城通信 No.36)

이 진술내용은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내용으로 의심할 여지없는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한 증거이다.


이상 살펴본 자료에서 드러나듯이, 일본군이 죄 없는 여성들을 직접 연행하여 위안부로 만든 경우가 틀림없이 존재한다. 이 자료들 역시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문서가 아닌, 제3국에서의 전범재판자료들이 대부분이다.

인륜에 반하는 행위를 일본국가차원에서 시행하면서, 그 사실을 자국의 공문서에 기록한다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한국이나 대만과 같이 일본의 식민통치하에 있었던 나라의 경우, 일본군의 방침은 곧 국가의 시책으로서, 군위안부가 아닌 다른 명목으로 여성들을 동원하였기에, 강제연행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는 더욱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타국에서의 이와 같은 일본군의 강제연행에 대한 증거자료로 미루어, 한국에서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그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