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lpnews-58 호

2001.9.14 발행


[한국의 여성운동가들-4]허정숙 "계급해방"과 "여성해방" 사이에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주의자로서의 허정숙의 투철한 삶

허정숙(1902~1991)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단상. 첫째, 한국에서 출판된 북한인물사전에 그의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북한의 고위급 인사였다는 것. 둘째, 항일변호사로 유명한 허헌의 딸이라는 것. 셋째, 몇 번씩이나 공산주의자 남편들을 갈아치운 '붉은 연애' 주인공이라는 것.

이렇게만 알려진 허정숙의 궤적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여성해방을 고민하며 실천하던 탁월한 혁명가이자 이론가이며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을 체계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그의 집에 드나들던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낸 허정숙은 일찍부터 여성문제에 대한 글을 쓰고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면서 여성해방운동을 시작했다. 

허정숙은 1925년에 발간된 <신여성> 12월호에서 "지나간 날의 미지근한 감정을 내어버리고 정열 있고 예민한 감정의 주인공의 되어 자기 개성을 살릴 줄 아는 여성이 되자"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인식하고 자신의 인간적 권위를 확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인간다워 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근대적인 억압 속에 묶여있던 "조선 여성들의 감정을 북돋우자"는 것이 그의 주장.  

그러나 중국·미국 등지의 유학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조선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 식민지와 계급의 문제임을 깨닫고 이른바 '인습타파'와 '교육계몽'에 중점을 두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운동과는 또 다른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귀국 이후 1928년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논문 <부인운동과 부인문제 연구>의 한 대목은 이러한 허정숙의 사유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텍스트. 

"조선여성은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가혹한 역사를 가진 인간일 것이다. 구미 각국의 여성은... 문명의 혜택과... 교육이 고등한 까닭으로... 남녀가 대등한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여성은 고루한 관습과 제도의 영향으로 전무교육상태에 있고... 현재 조선여성의 대다수가 무교육자인 가정부인이며... 대부분이 경제상으로 무산계급에 속한 여성이다... 조선여성에게는 개성의 자유나 인격의 대등은 아직 발생되지 아니하였다."

당시 조선 여성의 열악한 삶을 계급적 잣대로 분석한 이 글을 통해 그는 여성운동의 방향이 무산계급의 차원에서 전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여성해방은 서로 함께 맞물려있다는 것. 그 당시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가들이 항일투쟁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동맹의 항일조직화에 힘을 쏟던 허정숙 또한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종, 경성 항일학생 시위 주도, 조선공산당 재건 등의 혐의를 받아 구속됐으나 1932년 출감 이후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결심하고 나중에 남편이 될 최창익과 함께 1936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10년 동안 팔로군 정치위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교원 등 조선독립동맹 소속 항일무장투쟁의 전사로서 활동했던 허정숙은 1945년 초대 내각의 선전국장을 비롯한 북한 정부의 중책을 맡으며 88세까지도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제일선'이라는 30년대 잡지에서는 허정숙을 "조선의 프롤레타리아운동사상 잊혀지지 않는 한 용감한 투사다... 객관적 정세에 뒤지지 않고 꾸준히 그 이데올로기가 발전됐으며..."라고 평가했다. 

'동아일보'와 '신여성'에서 근무하던 기자 시절, 월급을 고스란히 근우회 활동비로 썼으며 나이 마흔에 홀로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과에 입학했던 운동가. 그토록 엄혹한 식민지 시절에 투철하고 강인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주의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오래도록 잊고 지낸 것은 아닐까.  

(이지안mulu@kdl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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