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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6년만에 첫 승… “휴∼ 살았다”

스포츠동아

입력 2010-02-05 07:00:00 수정 2010-02-05 08:21:21

내 생애 최고의 경기 조웅천, 1995년 눈물의 프로 첫 승

문학구장 전광판에는 조웅천의 역대 최다등판 숫자(813경기)가 이제 비석처럼 새겨져 있다. SK의 ‘레전드’로서 은퇴했지만 태평양 시절의 첫 승이 없었더라면 그 영광이 없었을지도 모른다.스포츠동아DB
프로 5년동안 승리는 커녕 세이브도 없었다

1994년 정리대상 명단…관둘수도 있겠구나

올해가 마지막이다… 이악물고 따낸 구원승

그경기 졌으면 ‘야구선수 조웅천’도 없었죠

내 생애 최고의 경기라…. 첫 승리가 떠오르네요. 그런데 혹시 아세요? 제가 통산 813경기에 등판했는데 그 첫 승이 과연 몇 번째 경기였을까요?

제가 1990년 태평양과 계약한 걸로 돼 있는데 사실은 1989년 연습생 입단이에요. 그러니까 1995년 6월 15일 수원 삼성전에서 첫 승을 올리기까지 프로 생활하면서 6년 동안 1승도 없었던 거예요. 패배만 몇 개 있었고 세이브도 없었죠.

나중에 알았는데 1994년 겨울 정리대상 명단에 제 이름이 들어있었대요. 그해 9월 확대 엔트리 때 올라와서 던졌는데 거기서 가능성이 있으니까 살려둔 것 같아요. 계약하는 자리에서 이 소리를 들었어요. “정리할만하면 가능성을 보이냐? 처음부터 잘 하던지.” 열 받아서 이랬어요. “자르기 전에 1995년까지 해봐서 (안 되면) 알아서 옷 벗을게요.” 대책 없이 지른 꼴이죠. 그러고 나니 ‘이제 마지막이다. 될 대로 되라’란 마음이 들면서 절박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당시 신인도 연봉 1200만원을 받던 시절인데 제 연봉은 1000만원 조금 넘었어요. 연습생으로 500만원부터 출발했어요. 그래도 돈을 모았어요. 광주 부모님께 돈도 부쳐 드리고. 일체 눈 안 돌리고, 야구장과 숙소밖에 모르는 생활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올해 안 되면 내년에 하겠지’란 안이함이 가슴 한편에 있었나 봐요. 5년을 그 모양이었으니. 그러다 1995시즌을 앞두고는 ‘관둘 수도 있겠구나’란 위기감이 처음 들었어요. 야구에 소질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왜 안 들었겠어요?

태평양이 1994년 준우승 하면서 ‘투수왕국’ 소리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타자 한 번 해 보겠다”는 얘기도 했었어요. 제가 원래 유격수 출신이거든요.

저, 원래 광주동성고(광주상고 전신)에 입학했었답니다. 1학년 겨울 때 기량 미달로 잘렸어요. 그래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지인을 통해 야구부를 알아보셨더라고요. 그래서 전학을 간 곳이 순천상고였네요. 거기선 제가 최고였어요. 기본기도 없이 실전에 나갔죠. 2학년 겨울부터 에이스 겸 유격수였어요. 당시 원광대, 성균관대나 해태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어요. 그런데 3학년 봄 때 슬라이딩을 하다 어깨를 다쳐서 1년을 쉬다시피 했죠. 스카우트 제의는 다 없었던 일이 됐고, 해태는 “배팅볼이나 던지라”라고 하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거절했죠.

그러다 고교 감독님 추천으로 태평양에 테스트를 받게 됐어요. 신용균 당시 수석코치가 다리를 놔주기로 돼 있었는데 연락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무작정 인천에 올라갔어요. 가니까 “왜 왔냐?”죠. “몰라서 왔다”니까 연습하래요. 그 무렵 태평양이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을 배출하는 등 2군 활성화를 할 때라 운이 좋았어요. 조경택(한화 코치)도 그때 연습생 동기에요.

계약도 안 하고 따라다녔어요. 그때 농협하고 게임이 있었는데 잘 던졌어요. 농협 감독이 “고졸인데 왜 쟤 볼을 못 치냐?”고 그랬대요. 스카우트까지 하려 했어요. 그것이 구단 귀에 들어갔나 봐요. 50만원 용돈 주면서 계약하자더라고요. 그러니까 입단은 정명원(히어로즈 2군 투수코치), 송진우(일본 연수) 선배와 같은 1989년인데 계약은 1990년이 된 거죠.

입단했는데 저만 백넘버가 없어요. 그래도 서운하다는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죠. 억지로 넣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했죠.

‘야구로 승부를 보겠다’는 마음이었어요. 힘든 운동, 무명의 서러움, 미래의 막연함을 견뎌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부모님이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분들 생각하면 견딜만했으니까요.

그런 야구를 계속 하느냐 마느냐가 1995시즌에 걸려 있었던 거죠. 아버지가 트럭에 채소를 싣는 운송업을 하셨는데 안 되면 같이 하려고 1종 보통면허도 땄어요.

그러니까 1995년 6월 15일의 일은 지금도 뚜렷이 남아요. 기록지 한번 보세요. 그날 선발이 최상덕 투수였는데 1회 투아웃만 잡고 3실점한 뒤 만루에서 저랑 교체됐어요. 제가 5회까지 4.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어요.

완벽했던 것 같지만 거기엔 고비가 있었어요. 5회 2사 2루서 삼성 이정훈 선수가 투수 앞 내야안타를 친 걸로 돼 있을 겁니다. 사실은 중전안타성 타구였어요. 그때 우리가 역전해서 5-3으로 앞서고 있었거든요. 그 안타가 빠져나가서 2루주자가 들어오면 강판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막았어요. 오른팔로. 공이 와서 맞은 게 아니라 제가 갖다댄 거였어요. 김시진 투수코치님(현 히어로즈 감독)이 올라왔어요. 맞은 충격으로 멍이 생기고 손이 떨렸는데 거기서 내려가면 승리투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잖아요. 무조건 더 던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다음타자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냈어요.

○조웅천 프로필

▲1971년 3월 17일 출생 ▲광주남초∼무등중∼순천상고 ▲프로 입단=1990년 ▲소속팀=1990년 태평양∼1996년 현대∼2001년 SK ▲은퇴=2009년 10월 ▲통산 성적=프로 20년간 813경기 64승54패98세이브89홀드 방어율 3.21 ▲수상 경력=2000년 홀드 1위, 2003년 구원 1위, 2005년 사랑의 골든글러브


6회부터 우리 팀 마무리 정명원 선배로 교체됐죠. 멍이 번져서 도저히 안 됐던 거죠. 그 후 3일간 게임을 못 나갔습니다. 그러나 또 2군 가라고 할까봐 며칠만 쉬면 할 수 있다고 우겼죠. 다행히 단순타박상으로 확인됐고요. 명원이 형이 4이닝 세이브를 해줬어요. 1989년부터 방장으로 모신 형이라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 알았죠. 일부러 자원해서 4이닝이나 던져서 제 승리를 지켜줬어요. 지금도 명원이 형은 제가 최고로 존경하는 선배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인터뷰란 것을 해봤네요. ‘누가 제일 기뻐하겠느냐’란 질문을 받는 순간 눈물이 났어요.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요. 그 전까지 야구에 대한 기쁨도, 성취감도 몰랐는데 그 첫 승으로 깨우쳤어요. 야구를 잘 해야 되는 이유나 쾌감을 알게 된 거죠. 그 다음부터 게임에 나가는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1게임이라도 더 던지고 싶었어요. 실패를 하면 실망하고 속상하죠. 그런데 성격이, 끝나면 잊어버려요. 그렇게 813경기까지 왔네요. 몸에 이상이 없었으니까 가능했겠죠. 감독, 코치님도 잘 만났고요. 그리고 김용일, 강성인 트레이닝 코치님이 시키는 대로 한 덕분이에요.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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