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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있었는데, 왜 몽양과 죽산의 묘가 없지?”
평양 애국렬사릉의 사라진 묘, 생겨난 묘
[25호] 2003년 04월 01일 (화) 00:00:00 민족21 minjog21@minjog21.com

북 ‘국립묘지’의 하나인 애국렬사릉에 묻힌 사람들의 면면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라진 묘가 있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복권돼  새로 생겨난 묘도 있었다.
무엇이 변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점검해 본다.

글 사진  정창현 / 국민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최근 상당한 변화가 확인된 애국렬사릉 전경.[정창현 제공]  

지난 2월 말 필자는 평양에서 개최된 ‘일제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범죄성에 대한 남북공동자료 전시회’ 행사에 참가 차  방북하였다. 이 기간 중 필자를  비롯해 평양 애국렬사릉을 찾은 남쪽의 역사학자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역사공부’를 했다.

묘비 하나 하나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북쪽의 현대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새로운 사실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물 선정기준의 변화와 과거 ‘정치적  사건’에 관련된 인물의 복권에 따라 의미 있는 변모가 나타나고 있었다. 


‘동지’와 ‘선생’의 차이는?

   
  지난 2월 19일 애국렬사릉을 찾은 평양의 한 가족.[유수 기자]  
방북기간(2월 15∼25일)에 2월 17일과 19일 두 차례 애국렬사릉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실제로 ‘안내 선생’과 해설강사의 배려로 묘비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묘비의 호칭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임꺽정》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홍명희의 경우 2년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묘비에  ‘홍명희 동지’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홍명희 선생’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의 깊게 보니 이런 인물이 상당수 있었다.

이준 열사의 아들이자 신진당 당수였던 이용, 북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한 김창준, 일제시기  농민운동가인 강진건,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낸 정진석, 여성운동가인 류영준, 북을 대표하는 시인 리찬, 1930년대 김일성 주석을 도운 오태희, 북 정권의 초대 보건상을 지낸 리병남, 교육자이자 조선인민당 중앙위원을 지낸 리만규, 어학자이자 조국전선 의장을 지낸  리극로, 경제학자이자 북 초대 교육상을 지낸 백남운, 월북  음악가인 리면상, 경제학자였던 김광진, 조국전선 의장을 지낸 최원택,  장안파 조선공산당 당수와 북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역임한 리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류연화 등이 처음에는 ‘동지’라고 호칭됐으나 모두 ‘선생’으로 바뀐 것을 이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묘비에 쓰여진 ‘동지’와 ‘선생’이란 호칭에 대해서 그 동안 일반적으로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사람에 대해서는  ‘동지’라고 부르고, 비당원에게는  ‘선생’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같은 기준이 맞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애국렬사릉의 해설강사 백광옥(38) 씨는 “렬사들의 호칭이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렬사들을 어떻게 호칭했는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며 “다만 학술, 문화, 예술분야에 종사한 분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선생’이란  칭호가 부여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원 여부와 관계없이  최윤구, 김원균, 박세영 등 학자,  음악가, 문학가들에게는 ‘선생’이란 호칭이 부여돼 있었다.

여성이 경우 대부분 ‘녀사’란 호칭이 쓰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 비서였던 허정숙, 항일무장투쟁 참가자 황귀헌, 농업근로자동맹 위원장 최성숙, 대남연락부장 정경희, 조국전선 의장 려연구, 무용가 최승희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 그러나 일부 항일무장투쟁 참가 여성과  젊은 여성의 경우 ‘동지’로 호칭됐다. 항일빨치산 류경수의 딸인 류춘옥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조선로동당 중앙위 과장으로 활동하다 40대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이곳에 묻혔다.

두 번째로 눈에 띈 것은 과거에는 있었는데 사라진 묘가 있다는 점이다. 해방직후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47년 피살된 몽양 여운형, 1959년 사형 당한  진보당 위원장 죽산 조봉암,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체포돼 이듬해 사형 당한 김종태, 최영도  등 남쪽 인사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대해 관리책임자는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라고 설명했다.

   
  2월 19일 애국렬사릉을 방문한 남쪽 대표단에게 백광옥 해설강사가 능의 건립과정과 묻힌 인물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정창현 제공]  
이들의 공통점은 ‘가묘(假墓)’라는 것이다. 이들의 시신이 묻힌 실제 묘는 모두 남쪽에 있다. 이 점이 고려됐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보았다. 그런데 이 곳에 똑같이 가묘를 쓴  6·25 전쟁시기 조선로동당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현,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 제주도 4·3항쟁의 주도자였던 이덕구·김달삼, 4·19시기 혁신정당이었던 사회당  서울시당 조직부장 최백근, 1957년 남쪽에서 체포돼 1959년 사형 당한 박정호 등은 그대로 있었다.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시신은 없더라도 가족들이 북쪽에 있어 유품을 안장한 경우는 그대로 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연구·여원구 등 여운형 선생의 가족들도 북쪽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딱 떨어지는 설명은 아닌 듯했다.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역시 과거 정치적 격변과 관련해 정계에서 사라졌던 인물들이 다수 이
곳으로 이장됐다는 사실이다. 먼저 소설가  한설야와 무용가 최승희의 묘가 눈에  들어왔다.

이들이 이곳으로 이장됐다는 것은 1990년대 들어와 이뤄진 ‘작품 해금’에 이어  정치적으로 완전히 복권됐음을 의미한다. 1960년대 초반 이들의 ‘잠적’이 ‘반체제 성격’의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 ‘생활의 문란’ ‘복고(復古)주의’  등 개인적인 문제였음을 짐작케 한다.

북의 대표적 시인인 김철 씨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조선문학》 2000년 8월호에 기고한 수기에서 한설야가 문예부문의 책임간부임에도 불구하고 고기보다 채소를 좋아했고 호텔 침대보다 온돌방을 택하는 소박한 사람이었으며 비행기안에서도 글을 쓸  정도로 글과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시조를 써내고 판소리의 탁성을 허용하면서 복고주의적 경향에 빠져들었고 당조직 생활을 게을리하고 당의 영도체계와 어긋나게 행동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언젠가 한설야의 집에 찾아갔을 때 전기온돌까지 깐 요란한 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탁성을 내고 곱사등이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라고 회상했다. 그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한설야의 작품집이  도서관 등의 서가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그의 사진이 앨범에서 뜯겨 나간지 오래됐으나 누구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998년 김 위원장이 애국렬사릉을 현지지도할 때 한설야를 재평가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사건’ 관련자 대거 복권

   
  [정창현 제공]  
한설야의 사망 날자는 이번에 처음으로 확인됐는데, 묘비에는 기존의 통설보다 늦은 1976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애국렬사릉의 중간쯤 올라가던 중 필자는 김정태(1928.1.13∼1987.11.12)의 묘를 발견하고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인물이었다.

그는 김책 전 부수상의 둘째 아들로 현 조선로동당 김국태 비서의 친동생이다. 그는  1960년대에 30대의 젊은 나이로 인민군 정찰국장에 올랐으나 1969년 1월 열린 인민군당위원회 회의에서 ‘당의 군사노선에 위배되는 행동’으로 비판받은 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그후 그는 전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해설강사는  “김정태 동지는 3년간 지방에 내려가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복귀해 대흥총국 부총국장으로 사업했다라고  설명했다.

김정태와 같은  비판을 받았던  김양춘(1969년 당시  인민군 군단장)의  묘도 있었다.

1969년 1월 회의에서 비판받은 상당수의 군대 간부들이 정치적으로 복권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69년 1월 회의에서 집중 비판의 대상이었던 김창봉 당시 인민무력부장, 허봉학 대남사업총국장의 묘는 없었다. 정치적으로 복권은 됐으나  ‘과오’ 때문에 이곳에 묻히지는 못한 것 같다는 추측을 해봤다.

애국렬사릉에 가서 꼭 확인하고 싶었던 네 사람도 이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 조선로동당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 전 정무원 농업위원장  김만금, 전 농업과학원 부원장 피창린, 전 개성시당 책임비서 김기선  등이 주인공이다.

이 가운데 서관히,  피창린, 김기선은 1997년 ‘과거 행적에 해명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돼 집중적인 검토를 받은 후 처형됐고, 1984년 사망해 애국렬사릉에 묻혔던  김만금의 경우 1973년 농업위원장을 그만두고 자리를 옮기면서 서관히를 후임으로 추천한 것이 문제가 돼 묘가 옮겨지는 비운을 당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방북 했을 때 필자는 북측의 한 관계자로부터 “이들이 처음에는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규정돼 가족들까지 큰 고초를 겪었으나 서관히만 농업정책 집행상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확정되고, 나머지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과거 행적은 모두 해명돼 가족들이 다시 복권됐다”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번에 애국렬사릉에 와서 그의  말대로 김만금, 피창린, 김기선의 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른 체하고 “다른 묘에 비해 20년 전에 묻힌 김만금 농업위원장의 묘비가 새  것처럼 너무  깨끗하다.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해설강사는 “곡절이 있었지요”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동행한 민족화해협의회의 간부에게 사건의 전말에  대해 묻자 “1997년 일부  ‘반당종파분자’들이 이들의 일부 경력을 문제 삼아 이들을 범죄자로 몰았다. 나중에 보고를 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9년 말쯤 ‘아무래도 이상하다. 다시 조사해  보라’는 지시가 있어 전면적인 재검토사업이 이뤄져 ‘반종파분자들의  잘못’이 있었음이 확인됐다”라고  설명했다.

그후 김 위원장이 ‘반혁명분자들의 혁명대열에 대한 이간책동으로 아까운 동무들이 희생됐다. 그들과 가족들에게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책상의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된 서관히 전 비서의 묘는 소문과 달리 이곳에 없었다.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는 현장

애국렬사릉에는 비사회주의계열의 민족주의 인사들도 상당수 묻혀있다. 애국렬사릉의 두 번째 줄에서 임시정부의 부주석과 해방 후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규식 선생의 묘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주변에 조소앙, 최동오, 조완구, 윤기섭, 엄항섭, 유동열  등 임정요인들이 묻혀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6·25 전쟁 때 북으로 간 인사들로 ‘애국지사’란 호칭이 붙어있었다.

애국렬사릉을 내려오면서 남북분단과 6·25 전쟁이 가져온 민족적 비극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현장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기에 묻힌 인물들 중에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와 일부 해방직후 남쪽에서 정당 활동을 한 인사들 외에는 남쪽에서 볼 때 생소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북쪽에서 “청사에 길이 빛날 위훈”을 남긴 인물로  칭송 받는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분단 58년이란 세월은 현실적으로 겪는 분단의 아픔뿐 아니라 과거 역사까지도 서로 화합하기 어렵도록 만들어버린 게 아닐까. 통일과 역사는 떨어진 것이 아닌 셈이다.[2003년 4월호]

 

혁명렬사릉과 애국렬사릉

북에는 남쪽의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묘역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평양시내를 굽어보는 대성산 주작봉 마루에 있는 혁명렬사릉이고 다른 하나는 평양시내에서 서남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형제산 구역 신미동에 자리잡고 있는 애국렬사릉이다.

대성산 혁명렬사릉은 1975년 10월 13일에 처음 문을 열었고,  1985년 10월 8일 재건 확장공사가 끝났다. 이곳에는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김일성 주석과 함께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지휘성원 131명(2003년 2월 현재)이 묻혀있다. 김일성  주석의 부인이었던 김정숙(1949년 사망)을 비롯해 김책 전 부수상, 김일 전 부주석,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 등 북 정권의 핵심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의 묘비와 흉상을 만날 수 있다.

반면 애국렬사릉에는 북의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관리, 항일혁명열사,  북으로 간 민족주의인사 일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묻혀  있다. 백광옥 해설강사는 “애국렬사릉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해  투쟁하다가 희생된 렬사들과 당 및 국가, 군대의 간부들, 과학·교육·보건·문화예술·출판·보도 부문 공로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애국렬사릉은 오목한 분지 가운데 돋아 있는 곳으로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배산임수형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양쪽으로는 산이 뻗어나가고 있고 뒤쪽에도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훤히 트여 한참 끝에 강이 흐르고 있다.

애국렬사릉의 묘비는 화강암 기단 위에 150㎝ 정도 높이의 흰 대리석으로 모두 통일되어 있다. ‘항일혁명투사’들의 반신상이 조각돼 있고, 분묘와 비석이 각 개인 앞에 하나씩  놓여있는 혁명렬사릉과는 차이가 있다.

애국렬사릉은 1986년 9월 17일 완공됐다. 당시까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애국렬사’들을 한데 모아 처음에는 190위가 모여졌다. 5년  후 40여 명이 늘었다. 현재는 571위로 세 배 이상 늘어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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