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과 성은공 휘 박승건과의 관계                                                                                                       자료: internet에서 발췌

 

『송시열은 장손이 된 송은석(宋殷錫)을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화록공후 봉례공의3남) 목사 박승건(牧使 朴承健)의 딸과 혼인시켰는데, 박승건의 장모가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또한 송은석의 부인은 김상용의 외증손녀인 셈이다. 이러한 혼인관계는 송시열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분들의 숭모(崇慕)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행록보기성은공 휘 박승건의 계보   노론 우암 송시열   소론 명재 윤증

 

회니시비(懷尼是非)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하면 일반적으로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소론의 영수인 우암의 제자 윤증(尹拯) 사이의 분쟁을 일컫는 말이다. 회(懷)는 우암이 살았던 회덕(懷德)을, 니(尼)는 윤증이 살았던 니산(尼山)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회니시비로(懷尼是非) 인해 서인(西人)은 분당의 길로 걷게 되고 두 당파의 사이에는 뿌리깊은 불신의 골이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지속하게 되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로 피해 본 사람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이 어이없는 당쟁은 그다지 생산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비에서 최대 숨은 피해자라고 송기태(宋基泰)라면 약간 의아해 할 사람들이 많다.

  송기태(宋基泰:1629~1711)는 우암 송시열의 아들로서 정확히 말한다면 양자(養子)이다. 그런데 왜 우암의 아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된 것일까? 좀 아리송하겠지만 숨겨진 비밀은 역사 속에 많이 있는 법, 어차피 회니시비도 어떻게든 부모를 위하는 지극한 마음에서 생겨난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회니시비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일반적 역사책에는 회니시비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가르키는 유학자(儒學者)의 사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본다면 대단히 놀랍고 위중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청나라가 무자비하게 조선 땅을 짓밟은 병자호란(丙子胡亂:1636~1637)으로 부터 시작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인조(仁祖)는 비참하게 삼전도에서 굴복해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볼모로 그리고 인질로 끌려가야 했다. 삼전도의 비극이 일어나기 전 인조는 소현세자와 차남인 봉림대군을 먼저 분조(分朝)형식으로 강화도로 먼저 피난시켰다. 과거 임진왜란의 해결책을 본뜬 것이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미 이 계략을 파악하고 인조보다 분조를 먼저 손봐야겠다는 전략으로 강화도를 먼저 공격했다. 결국 강화도로 간 세자의 일행은 참혹한 봉변을 먼저 당했다. 많은 관료와 그 가족, 그리고 호종(扈從)을 하러간 유생들이 모두 섬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어야했다. 특히 포로가 되기 싫은 여자들은 대부분 자결로서 수치를 극복하고자 했고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료들과 이름난 집안의 유생들은 죽음으로서 항거하여 엄청난 수의 목숨이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 많은 충신, 열사, 그리고 열녀들이 배출된다. 그 중에서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송시영(宋時榮,1588~1637), 윤전(575~1636) 그리고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처 이씨(李長白 女)가 모두 포로가 되길 거부하고 순절해버린다. 더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이 네 사람을 언급하는 것은 뒷 이야기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모든 일은 끝나 보인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은 뒷날에 터지기 시작했다.
회니시비의 발단을 시작하려면 먼저 윤휴(1617~1680)에 대해 알아야한다. 윤휴의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백호(白湖) 혹은 하헌(夏軒)으로 당파적으로는 남인(南人)계열로서 상당히 유학자로 이름 높은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는 비록 멀지만은 같은 할아버지를 둔 친척관계였다. 즉 송시열의 증조부였던 송구수(宋龜壽)는 윤휴의 조상인 윤형(尹衡)과 함께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원(李原)의 후손이었던 군수(郡守) 이구연(李龜淵)의 딸들을 함께 취한 동서지간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같은 진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姻戚)관계를 유지해 와서, 두 집안 모두 친밀한 사이었다. 그런데 윤휴가 당시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내 비추자 주자(朱子)의 열렬한 숭모자인 송시열은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서인과 남인은 이런저런 당파의 이해관계로 인해 점점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져만 갔다. 특히 윤휴는 당시 눈에 띄는 정치적 주장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는데 여기에는 효종 사후 다시 추진한 북벌론도 포함되었다. 그러자 서인들은 어이없는 주장을 해대는 윤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더군다나 서인들의 공공의 적인 남인의 영수 허적과 친밀했던 터라, 남인의 대표자격으로 비춰졌다. 그러다가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의 아들 허견이 종실(宗室)이었던 복창군 3형제와 함께 국왕을 몰아내고 다른 종실을 세운다는 역모죄에 걸려 허씨부자와 윤휴는 목숨을 잃고 만다. 보통 윤휴가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었다고들 하지만 그의 죄목은 그게 아니고 종실을 세워 역모를 꾀한다는 것이 죽음의 이유였다.

  당시 송시열은 윤휴가 죽기 전에 이미 학문상 이유로 절교(絶交)해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과 사상은 정통적 성리학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너무나도 친하게 지냈던 윤선거에게 윤휴와 친교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윤선거는 속으로는 그렇게 하기 싫었지만 송시열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터라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놓고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을 안 것은 윤선거가 죽은 후 윤휴가 제문(祭文)을 지어 보낸 걸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1629~1714)이 받아 두었다는 걸 송시열이 알게 된 이후였다.

  송시열은 노발대발했다. 윤선거가 분명 윤휴와 친교하지 않는다고 해놓고서는...
자신을 배신하고 거짓말까지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에 분한 나머지 과거 윤선거가 행한 적절치 못한 행적들을 낱낱이 들추면서 인간성에 대한 모욕을 가했는데, 즉 강화도 사건을 들추어낸 것이었다.

  강화도에서 모두 청나라 손에 죽어나갈 때 윤선거의 아내조차 스스로 자결하는 마당에, 혼자 살겠다고 하인으로 변장하고 나오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붙잡히자 스스로 ‘천인(賤人) 선복’이라도 둘러대어서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저 자는 천인 선복’이라고 윤선거를 비난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송시열의 제자이자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은 대단히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스승을 따르자니 아버지가 슬프고, 아버지를 따르자니 스승이 노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윤증은 스승을 설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노여움을 풀어주기를 바랬다. 그러다가 송시열이 남인들의 모함으로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지방로 나가게 되었다.

  윤증은 우암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다고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우암과 자신과는 인척(姻戚)인 특별한 관계를 생각해서 죽은 부친에 대한 묘갈명을 써 달라고 유배지인 장기에 찾아가서 부탁한다.

  당시 우암의 문장은 조선제일이라고 칭송받고 있어 내노라하는 가문의 인물들은 다투어 모두 우암의 문장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윤증도 당연히 우암에게서 부친의 묘갈명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찾아갔는데, 우암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기가 직접 짓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글이 잘 되었으므로 자신은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쓴다는 식으로 윤증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이었다. 그래서 윤증은 남들이 감탄할만한 멋진 문장을 스승에게 졸랐지만 우암은 계속 글자를 몇 개씩만 고쳐 줄 뿐 윤증의 마음에 흡족할 멋진 글을 써 주지 않았다.

  결국 윤증은 이 일을 계기로 스승을 원망하여 다른 사람 앞에서 스승의 험담을 하고 다녔다. 특히 박세채(朴世采,1631~1695)에게 비밀리 보낸 편지에서 우암을 역사적 사기꾼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글을 써서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박세채의 사위는 바로 우암의 손자(孫子)이자 송기태의 넷째아들이었던 송순석(宋淳錫)이었다. 장인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윤증이 장인 박세채에게 보낸 이 엄청난 내용의 편지를 보고 베껴서 할아버지에게 보여 준 것이었다. 이 편지로 인해 두 집안은 불구대천 원수가 되었다. 우암은 자신을 죽일 자가 윤증일 될거라고 극언을 하였고, 서인들 사이에는 노장파와 소장파간 일어난 김장생(金長生)의 손자 김익훈(金益勳)사건까지 이 일과 더해져서 완전 당파가 갈리고 말았다.

 송씨가문과 윤씨가문 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면 송시열과 윤증이 거주한 회덕과 니산(현재 논산)은 같은 기호지방이고 은진송씨(恩津宋氏)와 파평윤씨(坡平尹氏)는 당파도 함께 서인에 속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통혼(通婚)관계를 유지해왔다. 은진송씨와 파평윤씨의 통혼관계는 다음과 같다.

<은진송씨(恩津宋氏)>
송구수(宋龜壽)-子송응기(宋應期)와 子송응광(宋應光)
송응기(宋應期)-子송방조(宋邦祚)-子송시영(宋時榮)과 子송시형(宋時瑩:出系) 그리고 子송시염(宋時琰)-子송기후(宋基厚)-사위윤행교(尹行敎:坡平尹氏)
송응기(宋應期)-子송갑조(宋甲祚)-子송시열(宋時烈)-養子송기태(宋基泰)
송구수(宋龜壽)-子송응광(宋應光)-子송희조(宋熙祚)-養子송시형(宋時瑩)-子송기태(宋基泰:出系)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창세(尹昌世)-子윤황(尹煌)과 子윤전그리고 사위 송희조(宋熙祚:恩津宋氏)
윤황(尹煌)-子윤문거(尹文擧)와 子윤선거(尹宣擧)
윤문거(尹文擧)-子윤전(尹搏:夫人 恩津宋氏 宋時烈 女)
윤선거(尹宣擧)-子윤증(尹拯)-子윤행교(尹行敎:夫人 恩津宋氏 宋基厚 女)
윤전-사위송시형(宋時瑩:恩津宋氏)

 

4대에 걸쳐 송씨와 윤씨는 혼인관계가 연결되어 있다. 먼저 윤씨가문에 장가든 송씨는 송희조(宋熙祚)로 송시열의 종숙(從叔)이었다. 송희조의 부인은 윤창세(尹昌世)의 딸로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없자, 종형(從兄)인 송방조(宋邦祚)의 아들 송시형(宋時瑩)을 양자로 삼았고 이어서 양자를 처남인 윤전의 딸과 혼인시켜 송기태(宋基泰)등 4남2녀을 얻었다.

 

송기태는 송시형의 차남이었고 밑의 두 아우는 다른 친척집에 양자로 가서 형과 둘이서 집안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송시열의 부인이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이색(李穡)의 후손인 도사(都事) 이덕사(李德泗)의 딸이었는데 2남2녀를 낳았으나 아들 둘은 모두 요절해버렸다.

그러자 송시열은 1658년 늦은 나이로 양자를 입양하기로 결정하는데, 불행히 우암의 형제들은 자식이 너무 귀해 양자로 들일 친조카가 없었다. 형제들도 자식이 없어서 차남 이하의 조카들을 너도나도 양자로 들여버려 늦게 송시열이 양자를 들이려 했을 때는 친조카 중에 양자로 갈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종형제 중에서 물색하다가 송기태를 입후하는데 당시 송기태는 당시 자식이 5명이나 있는 30대의 젊은 아버지였다.

우암이 송기태를 입후한 이유는 아마 모계집안이 좋았기 때문이었을 거라 추측된다. 송기태의 생모는 강화도에서 순절한 윤전의 딸인 명문 파평윤씨 출신이었고, 친조부인 송방조는 송시열의 백부로서 아버지대의 형제 중 유일하게 문과(文科)에 급제한 인물이었다. 송방조의 처외조(妻外祖)는 정종(定宗)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인 종실(宗室)집안이었고 장남인 송시영은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신으로 이름 높았다. 그래서인지 송방조의 후손들은 다른 친척들에게 많이 입양되어갔는데 송기태도 양자로 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송시열의 양자로 입후될 때 이런 사정이 고려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송시열은 강화도에서 순절했던 종형 송시영(宋時榮)과 윤전의 용기를 사모하고 있었고, 거기다 송기태의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장남이며 선조(宣祖)의 큰형인 하원군(河原君)의 봉사손(奉祀孫) 이정한(李挺漢)의 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송기태는 당시 가문 어른 중에 제일 유명한 어른의 양자로서 입후되는 영광을 얻었고 30대인데도 아들이 5명이나 있어서, 송시열은 송기태를 양자를 들임으로서 후계에 대한 근심을 들 수 있었고, 송기태는 상신(上臣)의 아들이라 하여 양자가 된 후 곧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송시열은 장손이 된 송은석(宋殷錫)을 밀양박씨(密陽朴氏)인 목사(牧使) 박승건(朴承健)의 딸과 혼인시켰는데, 박승건의 장모가 바로 김상용(金尙容)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송은석의 부인은 김상용의 외증손녀인 셈이다. 이런 혼인관계는 송시열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분들의 숭모(崇慕)의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송기태는 입후 된 이후 거듭되는 관직생활을 하게되는데 처음엔 하급직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지방관으로서 외지로 자주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이 점차 다투기 시작하자 그의 입장은 몹시 난처해지기 시작했는데 윤증은 바로 자신의 외가친척(정확히는 6촌)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누이의 남편인 윤전도 윤증의 종형제(從兄弟)라 서로가 곤란해하고 있는 처지였다.
서로가 아버지이자 장인인 송시열이 파평윤씨를 상대로 다투는 것에 대해 어쩌지도 못할 처지였는데 그건 윤증이 아버지를 위해 스승을 버렸다는 험담을 듣듯이 송기태와 윤전도 아버지와 장인인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당쟁은 친척도 인척도 구분하지 않고(즉 安眠沒收) 서로가 더욱더 싸우도록 만들어가고 있었고 싸우다 지치는 쪽은 완전한 정치적 패배를 뜻했다. 즉 두 번 다시 출사란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외6촌형제을 두고 자기를 죽일 놈이라 으르렁거리고, 6촌은 6촌대로 아버지를 천하의 사기꾼이라 험담하고 다니고......
자신은 그 중간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질 처지도 아니었다. 역사에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 더구나 송기태의 생모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서 아들들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친정과 시집이 이런 천하의 원수가 될 줄을 꿈에서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씨는 노론으로, 윤씨는 소론으로 돌아서버렸고 훗날은 서로 원수가 되서 서로를 죽이려 드는 이런 정치에 대해 얼마나 원망하고 상심해 했는가에 대해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송기태는 양자가 된 후 아버지의 정치역정과 인생의 격정을 같이해 나갔는데, 남인이 정권을 차지하면 아버지는 귀양 갔고 자신은 어김없이 관직을 박탈당해 의금부 옥에 갇히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더구나 아버지가 정읍에서 역적으로 몰려 비명에 사사 당하자, 그는 상주(喪主)로서 쓰러지고 혼절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쫓겨가서 근신하고, 그러다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 관직에 나가고....
또 장희빈의 사사 후 경종과 영조를 둘러싼 치열한 서인간의 분쟁 즉 노론과 소론이 싸울 땐 송기태의 비극은 우리가 알만한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소한 일이 엄청난 결과를 낳는 마치 ‘나비효과’의 전형이 이 회니시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소한 서로의 의심이 집안을 흔들고 종국엔 나라까지 흔들어대는 것이다. 거기다 한 개인의 비극도 함께 일으키는 것이다. 아마 이 회니시비의 여파에 당한 사람은 송기태 외에도 윤전이나 그리고 윤증의 아들 윤행교(尹行敎)도 함께 했을 당했을 것인데 윤행교의 부인이 바로 송기태의 재종형제인 송기후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송씨가 모두 노론으로 돌아서버렸을 때, 시집과 친정이 목숨 걸고 싸울 때 윤행교의 처는 또 어떤 심정이었을까?

세상이 역사에는 알려진 이야기보다 숨겨진 이야기가 더 많다. 가문과 가족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할 그 옛날에, 당파와 당쟁의 희생양은 싸우는 당사자들 틈에서도 얼마든지 있다는 숨겨진 또 하나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