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존슨은 워싱턴포스트지가 지난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 및 최고의 작품을 남긴 작가로 꼽은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입니다. 그는 1709년 영국 중부 리치필드 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해서 뛰어난 지성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중퇴하게 됩니다. 그런 그가 혼자 힘으로 8년의 작업 끝에 1755년 영국 최초로 영어사전을 발간하여 영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합니다. 그밖에도 자신의 풍자시와 함께 영국의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을 정리하여 「영국 시인전」 10권으로 내놓습니다. 이런 업적으로 해서 옥스퍼드 중퇴생인 존슨은 “존슨 박사”(Dr. Johnson)로 불리게 됩니다.

새뮤얼 존슨 자신의 작품과 더불어 31세나 연하였지만 평생 교분을 나눈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보스웰(James Boswell)이 1791년 발간한 「새뮤얼 존슨의 생애」라는 전기가 있어 오늘날도 존슨에 관해서는 풍부한 자료가 있는 셈입니다. 독자들은 그 자료들을 통해 존슨의 풍자에 웃고, 그가 씨름한 의심과 두려움에 공감하며, 아내를 잃은 슬픔에 동참하고, 무엇보다 그의 영혼이 실린 기도에 감동을 받습니다. 가난해서 옥스퍼드를 다니다 만 존슨은 26세에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인 미망인과 결혼하여 고향 근처에 학교를 열고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작가로 살기로 결심하고 런던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처음에는 잡지에 의회와 관련된 기사를 기고하는 걸로 먹고 살다가 풍자시 「런던」(1738), 「인간소망의 헛됨」(1749), 비극 「아이린」(1749) 등을 내놓으면서 이름이 알려집니다. 그리고 영국 최초의 영어사전을 내놓기에 이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새뮤얼 존슨이란 사람은 뛰어난 문학가였나보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존슨의 친구요 추종자인 제임스 보스웰은 존슨의 신앙심에 감화를 받아 처음으로 헤이그에서 성공회 성찬례에 참여하게 되고 아들 찰스가 태어나자 성공회의 세례를 받게 합니다. 존슨의 신앙심 얘기를 하자면 어머니 얘기부터 해야 합니다. 존슨이 네 살 때 어머니는 어린 존슨을 침대에서 옆에 눕히고 천당과 지옥 얘기를 해줬답니다. 즉 천당은 좋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곳이고 지옥은 나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이 기억이 생생하게 남은 탓인지 존슨은 평생 영원이란 주제를 숙고하게 되고 이생을 영원의 서곡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쉼 없이 씨름하고 세심하게 사색하는 한편으로 단호한 특성 또한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작가로서 그가 고르고 사용한 단어는 늘 바탕에 신앙적 관점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하지요. 대개는 신앙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은연중에 암시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영어사전을 만들 때도 인용문은 그가 보기에 건강한 윤리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본 작가들 것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존슨 자신은 성직자가 아니다보니 설교강단에 오를 일은 없었지만 남을 위한 설교는 50편 가량이나 써줬다고 합니다. 그 설교내용을 보면 단순히 인간행위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동기가 되었을 생각부터 파헤치는 특성이 있답니다. 글이든 설교든 인간을 면밀히 읽는 데서 비롯되는데 존슨은 누구보다 자신을 잘 보는 사람입니다. 「아비시니아 왕자 라셀라스 이야기」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사람은 자신을 살핌으로써 다른 사람들 마음에 뭐가 지나가는지 아는 법”이라는 말을 하는데 다름 아닌 존슨 자신의 관점이라 하겠습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존슨의 독법은 바로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가르침을 통합하여 자신 뿐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도덕률과 원리를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존슨이 보기에 사람들은 이마 자신 안에 진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새로운 일깨움이 필요한 존재라고 설파합니다. 이렇게 자기 내면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성서와 전통을 하나로 아우르는 접근이란 그 자체로 대단히 성공회적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함이라고도 하거니와 이 공감의 사회적 표현이 정의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성공회 영성이 해답을 다 마련한 듯이 구는 타 교파들과 달리 매 시대, 매 개인의 경험을 깊이 듣고 깊이 들여다보는 태도,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보다 신학적 숙고과정의 지난(至難)함을 인내하는 태도는 존슨과 같은 사람들이 불어넣은 인문적 감수성 탓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런데 새뮤얼 존슨의 내면은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합니다. 오히려 격정과 번민의 소용돌이 같은 영혼의 검투장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의 영국 지성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존슨도 이성이 진리의 출처이자 인간정신의 조정자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성은 그가 원하는 곳까지 그를 데려다주지 못했습니다. 존슨은 신앙을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있길 원했지만 흔쾌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은 평생 달고 다니는 동반자였습니다. 그 시절엔 그저 멜랑콜리한 기분으로 표현되곤 했지만 오늘날로 치면 존슨은 만성 우울증이 있었던 듯합니다. 50대 초반에 존슨은 거의 일도 안하고 방에만 처박혀 있곤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망각할까 걱정하고 광기에 사로잡힐까 두려워하면서 이 시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더 나쁜 것은 그의 완벽주의 성향입니다. 존슨은 자신이 우울해져 하느님이 주신 재능을 낭비하는 것도 전적으로 자기 탓이라며 괴로워했습니다.

내면의 거친 풍랑과도 같은 감정들, 완벽주의 성향에 더해 존슨은 지옥의 공포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구원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늘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셨지만 그 문은 개인이 순종과 회개로 들어서야 하는 문인데 자신이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 존슨은 의심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의 전기를 쓴 보스웰은 “존슨의 마음은 원형경기장, 로마의 콜로세움과도 같아 거기서 존슨은 검투사처럼 온갖 적, 맹수들과 사투를 벌였다, 그래서 일단 몰아내지만 그들은 또 돌아와 존슨을 공격했다”고 적습니다. 이런 새뮤얼 존슨에게 우리는 어떤 신앙적 증언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위안이나 기쁨과는 거리가 먼 신앙이니 말입니다. 그의 하느님상도 사랑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 같기보다 엄한 심판자 상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내면의 갈등과 어둠을 감추거나 위선을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검투사처럼 용감하게 맞서며 자기 한계 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 말년에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마음의 평안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죽기 몇 달 전에 친구에게 “인생이 훌륭해, 아주 훌륭해!”라고 했고 실제로 그는 평온한 임종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새뮤얼 존슨 덕에 도그마적 구원의 확신으로 인생의 해답을 다 알고 있는 양, 그래서 마음의 갈등은 전혀 모르고 사는 것이 땅에 사는 인간의 신앙인지 곰곰 되묻게 됩니다.(이주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