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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고구려

[ 高句麗 ]

요약 졸본(卒本) 지방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현재 중국의 둥베이[東北] 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한 고대국가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지안 고구려 돌무지무덤

지안 고구려 돌무지무덤

BC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渾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臨屯郡)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漢族)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이후 현도군(玄菟郡)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태조왕(太祖王, 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였다. 태조왕은 현도군을 푸순[撫順]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遼東郡)과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임둔군의 옛 땅에 자립한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다.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은 왕위의 부자상속제(父子相續制)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 때는 중국의 위(魏)·오(吳)·촉(蜀) 3국의 대립 시기였는데, 이때 동천왕은 요동군의 실권자 공손연(公孫淵)과 통교하고 위나라를 견제하는 등 국제적 안목을 넓혔으나, 242년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다가 관구검(毌丘儉)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丸都城)까지 함락되었다.

봉상왕(烽上王) 때는 선비족인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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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고구려 돌무지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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