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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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1.01.27. 오후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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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장석조네 사람들'의 한 장면. 이 작품은 고 김소진 작가의 동명 장편연작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197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하나였던 서울 성북구 길음동의 산동네를 배경으로 아홉가구가 한 일자로 들어선 기찻집에 세들어 사는 서민들의 애환과 사연을 팔도사투리의 대사를 통해 감칠맛나게 그려냈다. (사진=강일중)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무대는 1970년대 서울 도심 외곽의 구질구질한 산동네.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는 삶은 지질하고 궁상맞다. 섰다판에서 돈을 다 잃고는 지체장애 자식이 건네준 금반지를 잡혀 밑돈을 얻어 또다시 놀음으로 탕진하는 양씨. 큰 몸집 탓에 백골단으로 차출된 후 끝내는 행려병자가 되어 말로를 맞는 광수, 세들어 사는 집 주인 장석조와 놀아나는 젊은 마누라 때문에 속 썩이는 성금애비. 아홉 가구가 한 일자로 길게 뻗은 기찻집 인간 군상은 하나같이 이 사회의 패배자들이다.

서울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른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에는 그러나 따뜻함이 있다. 정겹기까지 하다. 이 작품은 췌장암으로 34세에 세상을 뜬 고(故) 김소진의 동명 장편연작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김소진은 "소설은 패배한 자의 기록"이라고 얘기했던 작가다. 그는 '장석조네 사람들'(1995)과 관련된 작가 노트에서 "나는 이 현실에서 졌다. 그러나 소설은 남는다. 왜냐면 나는 나와 함께 현실에서 패한 그들을 위무할 책무와 기억이 있으니까"라고 적었다. 그만큼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은 패배자들의 고단한 삶을 보이면서도 그들을 보듬고 상처를 어루만진다.

시대배경이나 등장인물이 구사하는 언어로 볼 때 이 연극은 이 시대 젊은 관객들이 성큼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과거의 모든 것이 빨리 잊혀 가는 시대다. 작품 속 장소는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 중 하나였던 성북구 길음동 산동네. 지금의 젊은 관객이 아파트숲으로 변한 이곳의 과거 모습을 머리속으로 상상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그려보기도 쉽지 않다.

언어도 마찬가지. 이 작품에는 팔도 사투리가 다 나온다. 극은 나주댁과 둘남어메가 각기 토속적인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로 싸우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 성금애비의 억센 이북사투리가 끼어든다. 생활어, 방언이 한데 뒤섞인다. 각 지방 사투리에 두루 익숙하지 못한 관객이 이해 못할 말이 툭툭 튀어나온다. 연극 프로그램에 등장인물들이 쓰는 40여 개 사투리의 뜻풀이도 해놓았을 정도다.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른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의 한 장면. (사진=강일중)

김소진의 소설을 연극으로 꾸며낸 김재엽 연출의 시선은 그 '잊혀 가는 것들'에 꽂힌다. 그는 김소진의 소설 속 우리 사회의 이야기들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임에도 그의 소설들이 잊히고 서점의 진열대에서조차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아쉬워한다. 김소진의 소설을 무대화하게 된 배경이다. 연출가 스스로도 "이번 작업을 통해, 만날 수 없는 (고인이 된) 작가를 만나보고 싶은 내 개인적인 바람을 충족하려 했는 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그런 배경 때문에 이 연극은 연출가가 이 시대의 젊은 관객들에게 김소진을, 또 김소진의 소설 속에 나오는 현실에서 소외되고 패배한 '낮은 곳의 사람들'을 잊지 말 것을 청하려는 의도가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2막으로 나눈 이 연극의 각 막 앞에는 김소진의 생전 모습과 그의 작가 메모가 영상을 통해 나타난다. 김재엽 연출은 공연 첫날인 21일에는 공연 시작 전에 시인 안찬수, 소설가 성석제ㆍ김연수ㆍ한강ㆍ윤성희 등이 참석해 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의 일부를 낭독하는 행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의 특징 하나는 공연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는 점이다. 2009년 2월의 대학로 혜화동1번지 극장에서의 초연과 그해 5월 연우소극장에서의 재공연 때 공연시간은 3시간이 넘었다. 막간 휴식시간도 있었다. 대학로 소극장 공연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다. 김재엽 연출의 김소진 작품에 대한 애착과 애정이 반영된 결과였다. 남산예술센터의 대학로 우수작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의 하나로 올린 이번 공연은 중간휴식 10분을 포함해 2시간30분이다.

금방 쉽게 다가서기에 부담이 될법한 연극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은 출연진의 연기앙상블이다. 누구 하나 주역이라고 꼬집어낼 수 없는 연극에서 출연진은 도시 한구석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사연들을 감칠맛 나는 사투리로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따뜻하게 표현한다. 관객의 향수와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 많다. 무대 앞쪽 공동변소 안에서 대변을 보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코믹하다. 또 네 번째 이야기 <별을 세는 남자들>에서 광수애비와 최씨, 박씨가 별이 빛나는 가을밤, 돌산 위에 걸터앉아 나누는 대화가 아프기도 하면서 여운을 남긴다.

뮤지컬 '빨래'에서의 열연으로 주목받은 이정은 배우, 최근 '있.었.다'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이갑선 배우, 여러 연극에서 조역의 역할을 잘 해내는 김하리 배우가 여전히 '장석조네 사람들'에서도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다.

1월21일 '장석조네 사람들'의 첫 공연에 앞서 있었던 낭독회의 사회를 보고 있는 김재엽 연출. 무대 뒤의 영상 얼굴은 고 김소진 작가의 생전 모습. (사진=강일중)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 = 극단 드림플레이(대표 김재엽)와 남산예술센터 공동제작. 대학로 문화활성화 지원사업.

제작진은 ▲각색 김재엽ㆍ유용석 ▲연출 김재엽 ▲무대디자인 서지영 ▲조명디자인 최보윤 ▲의상디자인 오수현 ▲음악감독 한재권 ▲소품디자인 김다정 ▲영상디자인 김일현 ▲분장디자인 이지연 ▲조연출 김애리ㆍ박효진

출연진은 이정은ㆍ선명균ㆍ백운철ㆍ우돈기ㆍ이갑선ㆍ김주령ㆍ박진수ㆍ김원주ㆍ이현호ㆍ권민영ㆍ서정식ㆍ김진성ㆍ김신록ㆍ이소영ㆍ유종연ㆍ김하리.

공연은 남산예술센터에서 1월21일부터 2월6일까지. 티켓가격 2만5천원.

오는 3월17일~3월27일에는 한국공연예술센터의 기획공연으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 위에 올려질 예정이다.

1월21일 남산예술센터에서 있었던 '장석조네 사람들'의 낭독회에서 소설의 일부를 낭독하고 있는 작가 한강. (사진=강일중)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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