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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궁예

[ 弓裔 ]

요약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재위 901∼918). 관제를 정비하고, 강원·경기·황해를 점령, 남서해 해상권도 장악했다.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신숭겸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피살되었다.
출생-사망 ? ~ 918
국적/왕조 후고구려
재위기간 901년∼918년
별칭 선종
활동분야 정치

성은 김. 몰락한 진골귀족의 후예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희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서 세달사(世達寺:興敎寺)의 승려(僧號는 善宗)가 되어 선종(善宗)이라 불렸다.

신라가 쇠약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진성여왕 5) 죽주(竹州:현 안성)의 산적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北原)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군도(群盜)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 또한 평산(平山)의 호족이던 박지윤(朴遲胤)의 귀부(歸附)와 해상무역에서 우위를 점하던 왕건가(王建家)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게된다.

이러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898년(효공왕 2)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松岳:현 개성)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武泰)에서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914년에 다시 연호를 정개(政開)라 개칭하였다.

궁예는 국사를 총리하는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하여 병부(兵部) 등 10부와 9관 등의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왕건(王建)과 제휴하여 진도(珍島)·나주(羅州)를 점령하여 남서해의 해상권도 장악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미륵신앙을 이용하였는데,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였다. 915년에는 부인 강(康)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후, 반궁예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등 호탕방일(豪蕩放逸)한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결국 그의 부하인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平康)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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