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처럼 느껴졌던 벨라스트라즈의 첫 킬 이후, 우리는 검은날개 둥지의 모든 네임드들 중에 가장 마초스럽고! 가장 파워풀하고! 가장 단순무식하며! 에본로크에 이어 <정작 네임드 자체는 별볼일 없지만 그리 가는 길의 잡몹은 귀찮기 그지없는 네임드> 2위에 당당히 마크된 용기대장 래쉬레이어를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이 진군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와우의 인스턴스 던전은 1주일에 한 번 리셋되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용기대장을 만나기 위해 1주일에 한 번은, 송곳니와 벨라를 잡아야 했던 것이다. 벨라전은 180초동안 이루어지는 격렬하고 짧은 싸움이다. 그러나 그 180초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간은 실로 길다.
1 기나긴 준비
상급 화염 보호 물약을 준비하기 위해 개인별로 돈을 벌고 재료를 모으는 시간은 넘어가자. 송곳니를 쓰러뜨리고, 벨라 방의 고블린들을 처치하고 난 뒤 40명 공대원들이 상층으로 이동한다. 사제들이 먼저 입장하고, 사제들을 보호할 소수의 호위 캐릭들도 입장한다. 상층의 앞에 있는 몹들을 처리하고 역술사 몹을 사제들이 지배해서 화염저항 버프를 걸기 시작한다. 패치되기 전의 상층에는 총 15명이 입장 가능한데, 사제와 기본호위 캐릭터 5명을 제하면 10명씩이 돌아가면서 상층 앞에 줄을 서고 대기하고 있다가 들어가서 한 명 한 명 버프를 받고 나온다. 못잡아도 20분은 걸리는 과정이다. 잠깐 느슨해진 이 와중에 누군가는 전화를 받으러, 누군가는 애기가 울어서, 누군가는 잠깐 자연의 부름을 받아서 자리를 비운다. 사제들이 전원 다 버프 받았느냐고 확인하고, 겨우 철수하려고 하면 자리 비웠던 사람이 잠깐 잠깐 하면서 울며 달려온다. 다시 버프를 주고 겨우겨우 벨라 앞에 모인다.
2 허무한 전멸
비싼 상급 화염 보호 물약을 하나씩 마시고, 전 공대원에게 풀버프가 돌아간다. 마나를 채우고 전사 순서를 정하고 다들 신경이 잔뜩 곤두선 채로, 첫 번째 전사가 벨라에게 가서 말을 건다. 난 싸워야해! 전투 시작! 그런데 벨라가 대뜸 옆을 돌아보고 브레스를 쏜다. 난리가 난다. 파티원들이 거의 빈사상태가 되니 힐러들은 힐 돌리랴, 정신없고 딜러들은 딜을 퍼부울 엄두가 안난다. 부랴부랴 전사가 벨라의 어그로를 확보해서 겨우 머리를 돌린 찰나, 힐 하느라고 정신없던 사제 하나가 아드레날린 걸린 줄 모르고 있다가 폭사해서 힐러가 반이 죽는다. 힐러가 반이 죽자 탱커를 살릴 사람이 없다. 첫번째 탱커는 아드레날린에 걸리기도 전에 눕고, 두번째 탱커가 센스 있게 제때 머리를 앞으로 돌리긴 했지만 역시 살리기 역부족이다. ... 결국 얼마 못가 전멸한다.
less..3 책임전가
전사가 투덜거린다.
"힐 못받아서 죽었어요. 전사를 아드레날린으로 죽이지 않고 힐 부족으로 죽이면 어쩝니까?"
힐러가 발끈한다.
"노느라고 힐 안했나요? 힐러가 초장부터 다 죽었어요. 왜 벨라가 이쪽을 돌아봅니까?"
탱커도 받아친다.
"도적측 공격이 먼저 들어갔어요. 있는 대로 도로 당겼지만 벌써 브레스는 나간 거구 어쩝니까."
도적도 가만 있을 수 없다.
"탱커가 그 정도 잡아줘야지. 극뎀딜 하라고 해놓고 그럼 뭐 어쩌라구요. 한다고 열심히 했구만."
공대 분위기 싸늘해지고, 공대장은 도로 다독여서 다시 상층 버프를 받으러 열심히 뛴다. 1번 코스가 반복된다.
4 계속되는 전멸
겨우 상층 버프 다 받고 모였다. 화보 들이켰다. 막 마지막 주의사항 점검하고 있는데 누군가 실수로 벨라에게 마법봉(총,활)을 쏴버린다/혹은 거리 잡으려고 들어가던 1번 탱커가 그만 벨라의 인식 범위 안에 들어가 버린다. 준비 안된 상태로 공대는 다시 전멸한다. 1번 코스를 반복한다. 겨우 상층 버프 다 받았다. 이쯤 되면 화보 준비를 조금 한 공대원은 슬슬 화보를 못 먹기 시작한다. 깐깐한 공대원이 '벨라전에 화보 안드시는 분 계십니다. 이런 정신 상태로 어떻게 벨라를 잡습니까? 한 번 잡았다고 만만한 놈이 아니에요! 다들 화보 드세요!" 그래도 없는 걸 어쩌냐? 못 먹는 사람은 못먹는다. 준비를 좀 덜해왔네요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는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다.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길드챗이나 직업 채널을 통해서 평소 주는 거 없이 미웠던 공대원이 화보도 안 먹은 걸 보면 자근자근 씹어준다. 서로 싸늘해진 상태로 다시 들이댄다. 화보 못 먹은 사람부터 퍽퍽 죽어나간다. 1프로 남을 때까지 살아남아서 버티다가 죽은 사람은 더욱 열불이 터진다. 한 두명만 생존자가 있었어도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화보를 3-4개나 아끼지 않고 먹었는데! 이 모든 게 화보 안 먹고 묻어가는 저놈 때문인 것 같다. 미워 죽겠다!
5 무덤 파기
왜 못잡느냐, 잡아본 놈을 왜 못잡느냐. 답답하기 그지 없다. 하던 대로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계속 구멍이 난다. 겨우 좀 가능성이 보이나 싶을 때는 꼭 처음 참가한 신입이 아드폭사 사고를 낸다. 기껏 마지막 화보를 먹으면서 이걸로 꼭 잡기를 하고 바랄 때는 처음 참가한 힐러가 제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냅따 첫 탱커 어글 잡히기 전에 힐 줬다가 브레스 직격으로 맞고 힐러 피해 발생한다. 아! 도대체 답이 없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여기저기서 사고가 나지? 묻어가는 놈들이 밉다. 우리 공대 전사들은 도대체 어글을 먹을 줄을 모른다. 딜러들은 전부 녹템 단검 들었는지 전사 6명 갈아칠 때까지 힐을 해댔는데도 벨라 피가 줄지를 않는다. 어쩌란 말이냐! 아차, 이번엔 내가 실수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실수지. 전멸을 8번이나 했는데 주의집중 흐트러지는 것도 당연하잖아! 하이고, 겨우 천신만고끝에 생난리 쳐서 잡긴 잡았네. 화보도 안 먹었을 때 잡다니. 아, 몰라, 지친다 지쳐. 아득바득 화보 먹으면 뭐해. 그냥 나도 판판이 화보 먹지 말고 대충 묻어가자.
이것이, 바로 '한 번 벨라를 눕힌 공격대가 벨라 앞에서 망가져가는 전형적인 코스'다. 도전할 땐 일어나지 않던 일이, 한 번 잡은 몹에 재도전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벨라를 잡는 법을 머리로 알게 되었고, 경험도 해봤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분명히 안다. 탱커가 이렇게 해줘야 하고 힐러가 이렇게 해줘야 한다는 걸. 대부분의 네임드들은 그 규칙에서 어느 정도 살짝 벗어나더라도 실수를 회복할 여유가 있다. 그러나 벨라는 살짝만 벗어나면 바로 전멸에 이르는 네임드다. 그러니 실수에 대한 비판은 엄혹하다. 공격받은 클래스는 또 나름대로 반론한다. 그러면서 공격대는 서로가 적이 된다. 의욕이 사라지고, 신뢰가 증발된다. 여기에 조금만 더 무게를 얹어주는 사고가 터지면, 그들은 언제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벨라스트라즈의 진정한 필살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하는 전투 디자인의 치밀함에 있다. 실수를 용납할 줄 모르는 사람들, 타인의 실수를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비난하는 철없는 게이머들에게 그건 공격대의 애초 목적 자체를 잊게 만드는 극약이다.
우리에게도, 그 일은 찾아왔다. 우리 공격대의 일곱 명 전사 중 한 명이 등장할 차례다. 이 친구는 성격 까칠하던 전사 A가 떠난 뒤 새로 합류했고, 전사 B와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경험이 많은 선발 공대에서 다른 클래스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전사로는 첫 레이드였지만 검은날개 둥지에 대한 지식은 빠삭했고, 나이는 어렸고, 특성은 무분이었으며, 먼저 떠나간 전사 A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까칠했다! 결정적으로 캐릭이 노움이었다! (.......) A-1 이라고 기호를 붙일 수 있는 이 전사가 벨라전 1번 전사로 배치되었던 어느날.
벨라전 1차 트라이. 첫 전사가 벨라에게 막 붙으려는 순간 과도하게 의욕이 넘친 한 드루이드가 도트 힐 마법을 전사에게 검. 벨라 힐러진을 향해 브레스 발사. 전멸.
전사 A-1: 아놔~ 누구세여~ ('여'라고 말하면 두배로 얄밉다(...)) 도트힐 넣지 마시라니깐.
벨라전 2차 트라이. 첫 전사가 아드레날린에 걸릴 때까지 버텼으나 아드 폭사 전에 누워버림. 순간 탱킹 공백이 발생하고 전사들의 조기 사망으로 전멸.
전사 A-1: 저 힐 끊겨서 죽었어여 (역시 '여'에 주목 (...))
벨라전 3차 트라이. 일제 소멸 매크로를 놓친 도적으로 인해 벨라가 옆으로 브레스 발사. 힐러들이 도적 및 전사를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역시 첫 전사 아드 폭사 전에 사망. 전멸.
전사 A-1: 전사가 꼭 아드로 죽어야지 힐 끊겨서 죽으면 안되는뎅. (뎅도 여에 못지 않다)
무던하게 참고 있던 사제 반장이 드디어 폭발했다. 이 사제는 공대 첫날부터 메인사제로 쭉 활동해왔고, 맡은 바 일을 성실하게하는 무게있는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이런 모습을 보였다. 공대장인 내게 그 사제가 귓말을 해왔다.
사제반장: 아 정말 전사 A-1님 너무 하네요. 말끝마다 전부 힐러 탓이라네요. 지금 사제 채널 분위기 말이 아닙니다. 공대장님. 도저히 못 참겠어요. 공대창으로 한 마디만 하면 안될까요?
사제반장이 바로 공대창으로 반박하지 않고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 이유가 있다. 조금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서, 내가 아직 공대장이 되기 전, 까칠한 전사 A가 아직 공대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전사 A와 전사 B (전사 A-1과 마찬가지로 타공대에서 활동 경험이 있는) 가 어느날 매우 시시한 (...) 일로 논쟁을 벌였다. 레이드 중 탱커가 아닌 전사들이 어떤 스킬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생산적인 논쟁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어린(...) 남자애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대로, 그냥 지기 싫어서 하는 싸움의 성향도 강했다.
공대장을 맡게 된 후, 나는 만약 레이드 중에 저런 싸움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생산적인 논쟁까지도 못하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분쟁은 막아야 한다. 그래서 초기에 공대원들에게 미리 말해뒀다.
"제가 다른 부탁은 안드리겠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레이드 중에 제가 볼 수 있는 공대창, 공대채널 등으로 분쟁이 일어날 경우 잘잘못과 무관하게 양측 공히 벌점 나갑니다. 싸우지 마세요."
이 원칙 때문에 사제 반장은, 말하자면 분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말을 공대창으로 꺼내겠다고 나에게 요구한 것이다. 나는 일단 대답했다.
"가능한 참으세요. 분쟁이 일어나면 양쪽 다 벌점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사 A-1님의 자극적인 발언 태도에 대해서는 제가 나중에 따로 주의드릴게요."
다행히 사제 반장은 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물밑은 아주 죽 끓는 솥과 다름이 없었다.
사제들의 쓰린 속을 달래고 있는 사이, 전사 클래스 채널에서 오가는 대화가 보였다.
"공대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네요."
"또 전멸하면 더 할 텐데."
"어떻게 하죠? 아, 너무 안 잡히네..."
"사기가 가라앉은 건요. 사제들이 좀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씀?"
"전사 A-1님이 한 말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않구 기분 나쁘게 바라보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래서 공대창도 싸늘하고..."
사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한 사람은 전사 A-1과 친한 전사 B였다. 이렇게, 8클래스 중 가장 굵직한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전사와 사제 클래스가 각각 다른 불만으로 동시에 끓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나는 생각했다. 아, 이것이 바로 공대 균열의 시작이구나. 이렇게 한 공대가 죽어가는구나. 불만을 표면상에 끌어내지 않는 것은 최소한의 방어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 40명이 모인 집단 내에는 불만이 끓기 마련이고, 그렇게 끓어오른 불만은 어떤 방식으로든 공대의 혈관을 경색시키고 조금씩 세포들을 죽여간다. 그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벨라 앞에서.
누가 공격대를 살해하는가?
벨라가 아니다.
분열이다.
벨라라는 몹의 성격상 돌출되기 쉬운 '책임소재'의 분명함이 야기시킨 분열이
공대를 죽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