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MT의 추억' 대성리역(驛) 헐리다

입력 2009.03.07 02:49 | 수정 2009.04.14 17:10

경춘선 전철화 공사로 강촌·청평역도 옮겨
"보존할 길은 없었는지…"

1957년부터 만 52년간 MT(수련회) 가는 대학생들이 통기타와 배낭을 멘 채 셀 수 없이 타고 내리던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역이 지난달 헐렸다. 이에 따라 서울 청량리역 시계탑 밑에 모여 콩나물시루 같은 기차를 타고 대성리역에 내리던 'MT의 추억'이 이제는 지나간 시대의 풍경이 됐다.

지난달 10일 진행된 대성리역 철거 공사는 딱 3시간 걸렸다. 한국철도시설공단 직원들이 굴착기 두 대로 역사(驛舍)를 허물고, 경춘선(京春線) 열차가 지나던 승강장과 철길도 걷어냈다. 역사 뒤에 서 있던 오래된 전나무 두 그루도 베어냈다. 한 시간 간격으로 대성리를 지나는 무궁화호 열차 승객들은 옛 역사에서 50m쯤 떨어진 임시 역사를 통해 열차에 타고 내리고 있다.

역사가 헐린 뒤,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나와서 역사 터에 유물이 묻혀 있는지 조사 중이다. 문화재청 조사가 끝난 지점에서는 전철역 짓는 공사가 시작된다. 전철역은 2010년 완공된다. 간이역 플랫폼으로 기차가 덜컹거리며 들어오고, 역무원이 깃발을 흔들고, 대학생들이 좁은 개찰구로 꾸역꾸역 밀려나오던 풍경은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대표적인 MT(수련회) 명소로 자리 잡았던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역이 지난달 헐리면 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대성리 역은 주말마다 통기타와 배낭 을 든 수백명의 대학생들로 북적거렸다./김정현씨 제공

'첫 MT의 추억'

1980년대 이후 대학에 다닌 사람들에게 대성리는 '대학 가서 처음 MT 간 장소'로 각인된 경우가 많다. 대성리는 청량리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닿아 가평군 청평리, 강원도 춘천시 강촌리보다 서울에서 가깝고 기찻삯도 쌌다.

대성리역에서만 24년을 근무해온 채윤병(菜胤秉·58) 대성리역 역무조장은 "1988년 차표를 전산발매 하기 전까지는 입석 표를 무제한으로 팔았다"며 "72석짜리 기차 한량에 300명 넘게 바글바글 학생들이 탔다"고 했다. 승객을 너무 많이 태우는 바람에 열차와 바퀴 사이의 스프링이 주저앉아 연착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80년대 대성리역 광장은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학생들로 시장통보다 더 북적였다. 당시 대학생들은 지금은 없어진 비둘기호 열차를 많이 탔다. 비둘기호 열차는 요즘 전철처럼 좌석이 차량 벽에 기다랗게 붙어 있었다. 학생들은 대성리에 닿기 전부터 열차 바닥에 발 디딜 틈 없이 둘러앉아 마른오징어를 씹으며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MT 가는 길에 '라이벌'인 연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맞닥뜨리면 목이 쉬도록 경쟁적으로 자기네 학교 구호를 외쳤다. 연대생들은 "아카라카! 아카라카칭! 아카라카쵸!"를, 고대생들은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을 외쳤다.

대성리역에서 매점을 운영해온 이도종(李都鐘·53)씨는 "맥주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며 "술에 취해 쓰러져 잠든 학생, 소동 피우는 학생을 깨우고 달래느라 주말마다 진땀깨나 뺐다"고 했다.

개찰구에서 쏟아지던 학생들

역 광장을 나와 큰길을 건너면, 북한강 지류 구운천이 보이는 마을이 나왔다. 80년대 초반부터 이 마을에 '민박' 간판이 하나 둘 달리기 시작해 민박집·물놀이 장·구멍가게 등 다양한 업소 109개가 몰린 '대성리 MT촌'이 형성됐다.

민박집 주인들은 "옛날엔 기차 한 번 설 때마다 대학생이 300명씩 개찰구가 미어지게 쏟아져 나왔다"며 "그때 대성리는 지금보다 훨씬 북적거렸다"고 했다.

'선녀와 나무꾼' 주인 서용배(徐溶培·61)씨는 "학생들이 너무 많이 밀려들어서 민박집 주인들이 역무원들 옆에서 개표를 거들곤 했다"며 "학생들이 마을로 향하는 비포장도로를 걸으며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쳤다"고 했다.

'강변장' 주인인 신현필(申鉉弼·57)씨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도 매년 200명씩 노조 깃발을 앞세우고 MT를 왔다"며 "정보과 형사들이 인근 민박집에 방을 잡아놓고 동태를 감시하곤 했다"고 했다.

6일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에 1박2일로 MT를 온 대학생들이 대성리 임시 역사(驛舍)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요즘 MT는 예전같지 않아"

대성리를 찾는 대학생들은 2000년대 들어 크게 줄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꽃피는 봄이면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저마다 학과(學科)나 동아리 깃발을 앞세운 대학생 무리가 하루 5000명 넘게 대성리에 내렸다. 요즘은 1000~1500명쯤이다. 대학생들의 개인주의가 짙어졌고, 허름한 민박집보다 말끔한 펜션을 선호하는 탓이다.

주민들은 "요즘 대학생들은 예전처럼 소란스럽지 않다"고 했다. 대부분 인터넷으로 민박집을 예약한다. 종이로 된 기차표 대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 차표 수거함도 텅 비었다. 역에 내리면 광장에 둘러앉아 웃고 떠드는 대신,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꺼내 기차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 바쁘다. 걷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많아 역에서 좀 떨어진 민박집은 아예 주인이 차를 가지고 마중 나간다.

◆사라지는 경춘선 기차역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기차역은 이곳뿐 아니다. 춘천역, 평내역도 이미 헐렸다. 올해로 개통 70주년을 맞은 경춘선은 북한강변을 낀 나들이 코스를 줄줄이 끼고 있어 유난히 젊은 승객들이 많았다. 내년까지 전철화 공사가 끝나면 초록지붕을 얹은 김유정역, 빨간 벽돌건물의 청평역, 대성리의 맞수인 강촌역이 모두 버려진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추억의 역사들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있어 헐어버릴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요즘 경춘선 열차에는 부쩍 사진 찍으러 나온 여행자들이 많아졌다. 올 초 코레일 수도권 북부 지사는 폐역(閉驛)을 앞둔 경춘선 역 12곳의 사진을 담은 기념 달력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노영수(盧永壽·58) 대성리 역장은 "소중한 공간을 없애는 건 아쉽지만, 더 편리한 전철이 들어온다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인터넷 사이트 '열차사랑(www.ilovetrain.com)' 운영자 임병국(林炳國·36)씨는 "경춘선에 대해 각별한 추억을 갖고 있는 이가 많은 만큼, 보존방안을 논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춘선이 전철화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경춘선 추억의 역사들이 하나둘 없어지는 가운데 8,90년대 낭만과 추억으로 기억되던 대성리역사도 사라졌다. 새로운 역사가 들어설 옛 역사터에서는 선사시대 매장문화재유물 존재가능성으로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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